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2011년을 겨우 한 시간 정도 남긴 지금. 텔레비전 채널들은 각종 시상식들로 채워지고 있다. 요 며칠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새해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한 해를 그럴듯하게 마무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삐딱한 내 시선은 전적으로 내 상황과 내 마음상태 때문이다. 마음껏 축하하고 축하받는 저들이 그저 부럽기 때문이다. 음... 내년 연말엔 대단한 축하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만을 소박하게 바랄 뿐이다.

2011년 12월 29일 목요일

김문수, 김근태 ,그리고 나꼼수에 대한 김동호 목사의 견해가 오늘 페북과 트위터의 핵심 주제들이다. 그 속에서 독야청청 빛나는 모 목사님의 유머!

2011년 12월 26일 월요일

방명록, 남기기...


(* 엉뚱한 사람들만 부지런히 들락나락하길래 방명록 기능을 없앴다. 하지만 그 동안 모인 '의미있는' 방명 기록이 허공으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서 여기에다 옮겨 놓는다. 통계를 내진 않았지만 흔적을 가장 많이 남긴 방문자는 볼 것도 없이 'ss'님! '상'이라도 하나 만들었어야 했을까...  )
bb: 호오. 운동권 조직은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구만. 아, 여럿이 모여서 운동하는 재미를 느껴본 게 언제던가... 여하튼 어디에서건 재미, 보람을 찾으면서 살도록 하자구.
20 May 11, 19:33
jb: 잘 지내시는가! 이번 주에는 날씨가 계속 흐릴거라더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낫구만. 오늘은 찬란한 햇빛도 구경할 수 있으니 말야. 지난 주말에는 모처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어. 우니팀과 비우니(?)팀간의 야구경기였었는데, 거기서 "홈런"을 날렸지 뭔가. 난 아직까정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니까.. :nuts: "나는 홈런타자다!" :cool:
25 Mar 11, 22:44
bb: 게다가 시시콜콜 일상 얘기가 대부분이라 난 도무지 펫북에 정을 줄 수가 없더라구. 아... 난 느린 게 좋아. 여유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게 아니야..
25 Mar 11, 22:42
bb: 글에서 왠지 나른한 봄날의 여유가 느껴지는걸? 흠. 분명히 파란만장했을 '프레시맨' 얘길 직접 한 번 들어야 할텐데. 조만간. 소설가 장정일씨가 한 얘기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양반은 베스트셀러는 한 번 큰 파도가 지나가고 난 후에 읽는다는 거야.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 우리가 반사적으로 내뱉는 말들... 나중에 들을 수 있다면 무지 부끄러울텐데...

ss: 이곳에서도 역시 봄을 느낄 수 있어요. 오늘은 기온이 부쩍 올라가서 사람들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고요. 봄이 오니 이제 정말 올 한 해가 시작한것같은 느낌이^^
24 Mar 11, 09:54
ss: 봄맞이 작업으로 이 공간도 새롭게 봄단장을 했군요! 말과 사진과 순간적인 느낌,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는 페이스북보단 역시 한 박자 천천히 가는 이 공간이.... (저도 페이스북의 '노예'가 돼버렸긴 하지만...
24 Feb 11, 21:28
bb: 내 삶의 영역 중에서 뭔가 쌓이는게 눈에 보이는 드문 공간이라서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지도... ^^ 어때. 벌린에서도 봄기운을 느끼시는가...
23 Feb 11, 02:22
BYK: 블로그가 멈추지 않고 활동적이네요 ^^
23 Dec 10, 13:28
bb: 감사! 반갑소이다. 임자 동생네와 매우 가까울 것이야. 연말 분위기는 좀 내고 계신가? 잘 보내길...
23 Dec 10, 08:15
jb: 이사했구먼... 고생이 많았겠네. 워디로 간 것이여?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즐거운 세밑 즐기시게.
25 Nov 10, 21:00
bb: 방가... 여긴 좀 어수선해 (뭐, 언론이 만들어 낸 분위기이지만...) 많이 추워졌고.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니 이 쪽으론 뭐가 잘 안 나오네. 사람냄새 나는 소식, 커뮤니케이션이 그리우면서도 막상 내 쪽에선 뭔가 잘 못하고 있어. 페이스북도 그렇고. 어휴. 지금도 그렇네. 나도 '뼈 이름 외기' 같은 거 하고 싶어. 끝이 보이짆아ㅠㅠㅠ
25 Nov 10, 05:32
ss: 지금 서울 분위기는 어떨지... 인터넷기사도 다 읽어볼 여유없이 시간에 쫒겨서 책상 앞에 앉아 '척추뼈'나 외우고 있어야 되는게 얼마나 답답한지...
25 Nov 10, 05:30
ss: 인적이 드물다고 그냥 스크랩과 단상을 메모하는 용도로 바꾸어버리신거에요? 정기구독자 한 명 있는거 잊어버리신듯 ^.^
1 Oct 10, 01:48
bb: Thank you, Salina. The same to you. Whoever you are...
30 Sep 10, 23:37
Salina: Nice day here, hope for you 2
31 Jul 10, 10:48
bb: 살 수 있겠지. 귀국 후 시간은, 뭐랄까, 중간기 같은... 그 곳 생각을 원천적으로 피하게 되는... 왜 궁금하지 않았겠어... 그렇더라도 이렇게 '반응'은 할 수 있으니 한 번 길게 써서 보내삼. '도대체' Bremen에서 뭘 하고 있는지... ㅎㅎㅎ
31 Jul 10, 10:41
bb: ㅋㅋ 꼼곰하게 안 읽고 '수려한' 독일어 문장에 'Bremen'이 눈에 띄어서 '정체'를 밝히는데 약간 시간이 걸렷음. 'ss'도 나중에 눈에 들어 오고. 음. 그 동안 내가 생각한 이상 많은 변화가 있었나 보네. 드디어 세상 속으로 한 발을 내 딛은 건가? 내 경우, 막혀있는 큰 돌을 치우거나 혹은 지금 이 산을 넘은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삶'을
31 Jul 10, 08:21
ss: und vermisse dich. Aber nur wenn ich so sagen darf =)
31 Jul 10, 08:20
ss: Was ich jetzt hier in Bremen mache, interessiert dich doch, oder? Ich wollte und würde so gern dir schreiben, aber du kennst mich....
31 Jul 10, 08:18
ss: Und hoffentlich sehen wir uns bald wieder. Man muss doch mal im Jahr sich sehen, oder? :) Tut mir leid, dass ich Deutsch schreibe, aber ander gehts im Moment leider nicht hmm
31 Jul 10, 08:16
ss: Hier in Bremen grüße ich dich mal. Ja....ja..... sehr lange nicht mehr von mir gehört, richtig? Gehts dir gut? Hoffentlich gut.
10 Jul 10, 23:26
bb: jb라면? 그... 반가우이. 한국은 그래도 30도 내외인데 35도라니. 요샌 독일이 한 술 더 뜨는구만. 여전히 구립도서관으로 열심히 출근하고 있지.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으려네.ㅠㅠ '없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서라도 즐기면서 살도록 하세. 너무... 비장한가? ㅎㅎ
8 Jul 10, 18:23
jb: 여기는 이니셜이 대세(?)군. 잘 지내고 있는지...... 최근에는 블로그도 조용하고 ...... 공부는 잘 되는겨? 지금 여긴 더운 날이 지속되고 있어. 내일(금)은 낮기온이 35도를 넘어간다네. 건강하게.
7 Jul 10, 20:53
bb: 그 번호가 그 번호였구나ㅎㅎ 무엇보다 시원해서 좋겠다. 여긴 지금도 장대 같은 비가 내리고 있지. 논문 잘 쓰고, 재미있는 관심사 잘 키워 나가길..
6 Jul 10, 03:41
YK: 한국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려 전화했었는데 연결이 안됬네요. 이제 다시 빌레펠트에서의 생활이 시작됬군요...
6 Jul 10, 02:55
chloe: hello~=]1st time visit ur blog ...nice,can u visit my blog back..?thx
6 Jun 10, 09:04
bb: yk 고국 방문 환영!! 한국은 이미 30도를 육박하는 한여름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오길^^ 핫메일 주소가 유효한지 모르겠네. 메일 하나 보내리다.
5 Jun 10, 04:18
YK: 안녕하세요| 그간 안녕하신지요? 한국소식은 인터넷을 통해서나 듣고 있습니다만, 최근 많이 시끄러운듯 하네요. 안그래도 조만간 직접가서 확인할수 있게될것 같습니다. 저 곧 한국에 짧게나마 머물게 될듯해요 ^^
26 Apr 10, 22:07
bb: 음. 방금 가 보고 왔어. 살짝 훓어보니 대개 공감할 수 있는 얘기더군.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대개 동의할 그런... 그런 '상식'을 갖추지 못한 분들께서 잠도 아껴가며 과중한 업무에 사달리는게 안타깝네. 여기 저기에서... 그 분들 좀 쉬도록 해드려야 할텐데..^^
22 Apr 10, 17:33
박종현: '탐진강'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사회 전반적인 이슈에 대해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있네.. 천안함과 이번 부산지검 검사 <피디수첩> 관련 글 읽다가 알게 된 블로거 인데.. 관점이 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가끔 들어가 보네.. 자네도 시간 있을 때 한번 가보게..
20 Apr 10, 07:42
박종현: 코멘트를 하나 달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아코디언이 아니고 멜로디언은 잘못 적었구만.. 나이 티 엉청 내고 있다..
6 Mar 10, 22:05
YK: 독일도 봄이 오는가 하더니만 어제 또 눈이 내렸어요. 제법 쌓인걸보니 봄은 아직 멀었나봐요. 네, 4월 중순까지 방학이긴 한데... 다음주에 브뤼셀에 잠깐 놀러갔다오려구요. 머리도 식힐겸, 새로운 것도 좀 필요하고 해서...
1 Mar 10, 02:54
bb: /YK. 벌써 삼월이야. 귀국 후 꽤 느리게 가던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게 느껴져ㅠㅠ 그러게. 독일에 다시 가야 할텐데... 늦어지네. 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게으른 것도 아닌데 늦어지는 현실... 그러고 보면 게으름을 찬양하거나 놀자고 큰 소리 내는 것도 아무나 못할 듯... 방학 중인가?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올 계획이 있는지...
28 Feb 10, 02:38
YK: 그러고 보면 한국과 독일의 일에대한 태도가 조금 다른듯해요. 일이라, 많이 하고 싶은만큼 많이 할수 있다면야 좋겠는데 말이죠... 어느덧 봄이 오기 시작하려나 봅니다. 2010년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어요. 독일엔 언제쯤 다시 오시나요?
23 Jan 10, 20:57
bb: 독하진 않은데 좀 끈질긴 녀석이네.. ㅠㅠ 한국 겨울 생각보다 센 걸^^ 힘내서 이겨내자구!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19 Jan 10, 03:10
ss: 어서 쾌차하세요
19 Jan 10, 03:09
ss: 감기라니... 예상치 못한 가슴아픈(?) 소식...... ㅃ
31 Dec 09, 23:19
bb: 지금 약 40분 정도 남았네, 2009년이... 곧 주어지는 새해엔 반드시, 필연코, 더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좀 가벼운 마음으로 보내줘도 되지 않을까 싶어. yk에게도 즐거운 일로 가득한 한 해가 되길...
31 Dec 09, 20:50
YK: 그래도 새해 좋은일들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viele Grüße von Bielefeld
25 Nov 09, 22:41
bb: 그렇지 않아도 이선생과 저녁 함께 하지고 하자고 하던데 지금 비상시국이라... 늦가을에 결혼을 했었구만. 축하...말 뿐이지만...
25 Nov 09, 21:07
박종현: 월요일 결혼 7주년 기념일 이었네.. 애들 땜에 그냥 넘기고 담 날 애둘 유치원 어린이집 가고 하나는 요령껏 맡기고 나서는데 동열군이 대구라고 보자고 문자가 왔더군... 만나기 힘들다고 했더니.. 삐쳤는지 기어이 전화를 했더만.. 암튼.. 동열이는 그냥 올라간 듯.. 몇일 후에 중국 간다더만.. 자네에게 연락이 있었는가?
20 Nov 09, 23:46
bb: 그런 수고를... 고마워. 이 '감금'생활을 끝내고 빨리 홀가분하게 다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걸.
19 Nov 09, 20:50
박종현: 괜히 글 쓰는데 방해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 보네.. 전화 바쁘면 안 받아도 되지 않겠나.. 오늘 규호와 통화했었는데.. 서울 있는 사람끼리 한번 볼생각이라던데.. 잘 지내게
19 Nov 09, 20:49
박종현: 친구들이 자네 소식을 몰라하는 것 같아서 한국에 있는 사람은 핸폰 문자로 자네 전화번호와 블로그 주소 날렸고 헌주에겐 싸이 홈피 방명록에 비밀로 올려놨네..
19 Nov 09, 14:38
bb: 반가우이. 메일로 소식 전하마.
18 Nov 09, 17:08
최헌주: 종현이로부터 귀국했단 이야기 들었다..새로운 시즌가운데 그분의 인도와 축복이 늘 함께하길 바란다^^
15 Nov 09, 21:31
bb: 응. 많지? 공개된 일기장이라 생각하고 닥치는대로 쓰고 있으니까^^ 골라서 읽으셔...
15 Nov 09, 20:51
박종현: 글이 많구만.. 계획을 잡아서 차근차근히 읽어 봐야겠네.. 생소한 단어들도 많고.. 질문해도 되는가^^ 나중에..
11 Nov 09, 10:14
bb: 반갑소이다! 손님들이 왔지만 막상 차린 게 별로 없는 식탁 같기도 한데, 손이 가는 음식이 드문 드문 있기를...
10 Nov 09, 21:51
BYK: 안녕하세요! 블로그가 자주 업데이트 되서 종종 들르고 있답니다. 빌레펠트는 뭐 여전해요. 앞으로도 재미있는 포스팅 기대할께요 ^^
1 Oct 09, 05:42
응원군2: 도착은 잘 하신건지?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며 멋쩍게 웃으시던 얼굴이 생생한데... 소식주세요 ^^
29 Sep 09, 23:56
JG: 현지 적응 훈련(?!)차 고국으로! 다른 분들이 많이들 응원을 해주어 따로 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마음속으로 응원을 하고 있겠슴다! 신들린듯 (교인에게 이런말을...그러나 이해해주리라 믿고...ㅋㅋ) 머리에 들어 있는 것들을 쏟아내는 생산적인 날들이 되길!
12 Aug 09, 23:50
JG: 왜 TT냐면여..그렇져...감동이져...ㅎㅎ. 그것도 컴터화면의 윈도우즈 배경에 있는 구름이랑은 다르쟈나여...나는 진짜 하늘을 올려다본지 오래된것 같아여...TT
12 Aug 09, 01:59
bb: ㅎㅎ 방가! 근데 왜 TT ? 감동의 그 뭐시기?^^ 고만고만한 서부유럽 도시들에 질려서인지 재미있더만. 소비에트 건물과 러시아정교 건물들이 반가웠는데 새로 지어지고 있는 큰 건물들은 대도시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그런 모양새라 급실망.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한옥마을 찾아가는 그런 심정이겠지만.
11 Aug 09, 22:56
JG: 캬아아....모스크바...롯데월드랑 똑같아여...구름 빼구여...TT
11 Aug 09, 05:06
bb: 어이쿠, 'the' '애독자'가 다녀가셨군. 그 시선을 의식하는 게 도움이 된단 말이지^^ 쌩유!
4 Aug 09, 09:29
PRIYA: ^^ 오랜만에 발도장을 찍고 가요! 참, 두 주 간은 새 글이 올라오지 않겠군요, Schade.
24 May 09, 07:27
bb: 반갑소이다. 허접한 방명록이라도 있으니 제법 기능을 하네 그려. 오늘은 참 우울한 날이지. 새시대의 큰 형님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 막내였다고 얘기하던 분이었으니 어쨌거나 그 '새시대' 도래가 앞당겨지길 기대할 밖에...
24 May 09, 07:08
인효: 형님, 인효입니다. 블로그 잘 보고 갑니다. '즐겨찾기'에 저장했으니 종종 찾아서 읽고 갈께요..^^
12 May 09, 20:42
JG: 덧글하나 올렸습니다...:)
17 Apr 09, 00:48
bb: /JG. 어서오시게. 길가다 주워서 들고 온 가구처럼 왠지 집에 어울리지 않는것 같긴 하지만 아쉬운대로 기능을 하네 그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초록빛깔이 어찌나 진한지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 좋은 하루...
16 Apr 09, 20:23
JG: 조금씩 가구를 들여놓으시는 군요..ㅎㅎㅎ...이 방명록 기능 재밌네요...제 이 내용없는 흔적남기기 때문에 다른 분의 글이 위로 혹은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면 그점에 대해서 송구스러운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절대 제 본의가 아닙니다.
16 Apr 09, 06:07
bb: 방명록 첫손님^^ blogspot 은 'minimal'한 건 마음에 드는데 부가 기능이 없어도 너무 없단 말이지. 조만간에 이사를 갈까 하고 집터를 보고 있는데, yahoo가 '의외로' 괜찮던데... 언급한 그 글, 제목이랑 내용을 조금 수정했어. 보시다시피 예상치 않았던 2부까지... 늘 들러줘서 감사.
16 Apr 09, 00:22
PRIYA: 참! 그때 올리신다고 하셨던 글이 저거 맞죠?
16 Apr 09, 00:18
PRIYA: 조그맣고 깜찍한 방명록이 생겼군요! 매번 엿보기만하고 도망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몇 자 남겨요. 바깥에 날씨가 계속 좋은데 적(?)들을 피해서 집에만 계신건지....
8 Apr 09, 02:26
테스트: 방명록을 만들어 보았다. 이 방명록이 과연 어떤 기능을 할지 사뭇 기대된다.. :cool: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최승자)

 개같은 겨울이, 아니 연말이 쳐들어온다, 아니 쳐들어왔다
 성탄절, 아니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연말연시는 그 연말연시가 아니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지는
  개같은 겨울이 쳐들어왔다

2011년 12월 24일 토요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난 그동안 그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 했었나 보다. bittere Wahrheit... 자신감을 갖고서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다. 그것 없이는...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금요일 오후. 이 공간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 전까지 끝내야 할 일이 하나 있고. 아. 그 일이란건 이 공간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종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조직에 속해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미련을 둘 여지가 깨끗이 사라져서 오히려 홀가분하다. 당분간 한참 동안은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서 몸을 웅크려야 한다. 더 높고 멀리 뛰기 위해서... 그 동안 웅크릴 힘을 비축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

읽지는 않았지만 독일 사회학자 악셀 호네쓰 (Axel Honneth)가 쓴 '인정투쟁' (Anerkennungskampf) 라는 책이 있다. '인정'(認定)... 어쩌고 하는  얘길 들을 때면 떠오르는 책. 인정하면 생각나는 이야기도 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예양의 고사란다). 인정... 자신을 알아주는...
즐겁게, 보람있게, 행복하게, 때로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래... 결국은 전부 인정받고 싶은 것 아닌가? 스스로 만족한다? 정말 혼자만 만족한다면 그런 만족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자기 만족도 결국 남에게서 인정받아야 완성되는 것이다.
인정받기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는 것 아닌가. 아침마다 옷장과 거울 앞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때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 책, 티비 프로그램 등도 챙겨 보고...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과장하기도 하고...
늘 당당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기! ( 스스로 인정하기!)  사실 그것 역시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전략 중 하나일 따름이다. 존재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 독립적이기 위해서 관계를 맺어야 하다니... 자기 만족(자기 인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니...

(그 공간에는 좀 더 머물게 되었다. 어쨌거나 몸을 움크려서 더 멀리 뛰기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임에는 분명하니 잘 된 일이다.)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악몽까진 아니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은 꿈을 꾸다. 어젠가는 꿈속에서 욕을 실컷해댔는데... 요즘 좀 어수선한 주변상항과 무관치 않으리라... 다시 잠들 수 있을까...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모처럼 달리기를 했다. 한 오십분 열심히 달렸으니 약 9km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새 수영을 좀 꾸준히 한 탓인지 몸이 가벼웠다. 누룽지탕으로 식사(+ alpha)하고, 샤워하고, 바하의 첼로조곡을 들으면서 노트북 폴더를 좀 정리하다 보니 퇴근해야 할 시간이다. 기분 좋은 피곤함... 달리기부터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 옆자리 선배가 고맙고 (그가 이 블로그를 볼 일은 없지만^^) 여름부터 이 공간에서 누렸던 시간이 고맙다. 곧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겠지만 그 변화 역시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내일 다시 보자구...

2011년 12월 8일 목요일

커뮤니케이션의 이중 우연성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 커뮤니케이션은 의도한 정보를 서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왜? 이중 우연성 때문이다. 내 의도는 이미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 지 결정되지 않았다는 우연성을 전제로 해서 형성된다. 객관적 의도란 없다. 상대방의 반응을 고려한 내 의도가 우연적이고, 상대방이 내 의도를 수용하는 과정도 우연적이다. 오해를 피하는 최선의 방식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것! 그저 침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침묵도 오해를 낳으니까.
어짜피 오해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생각나는대로 내지르는게 현명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속은 시원할테니... 너무 눈치 없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선 눈치보기가 지나쳐서 문제인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별 대단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겐 건성일지라도 인사만 꼬박꼬박 잘하면 칭찬 받는다. 친한 사람과는 당연히 인사 그 이상의 대화가 자연스럽다. 문제는 애매한 관계일 경우... 그 경우 눈치를 보게 된다. 내가 먼저 인사 이후 다음 대화를 시작해야 하나, 아니, 기다릴까. 무슨 얘길 꺼내야 하지. 왜 내 눈을 피하지? 먼저 아는 척을 할까 등등.
오늘 새삼 느낀 거지만 그렇게 망설이는 순간이 찾아오면 먼저 말을 건네는 게 마음 편하다. 암. 백번, 천번... 상대가 모른 척한다고 나도 모른 척 하지 말 일이다. 외면하는 이도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해서 너무 배려하지 말 일이다.

2011년 12월 1일 목요일

12월이다 12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달력이 너무 얇다... 그런 얘기들이 오늘도 여기 저기에서 오고 갔을 것이다. 올해도 넘겨야 하는 일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더 없이 우울한 하루였을 수도 있고. 12월이 되어서 좋아하는 이들은... 글쎄... 방학을 기다리는 학생들 정도? 해야 할 일들이 모이고 있다. 결정을 기다려야 할 일들도 좀 있고. 집나가려는 집중력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 퇴근할 때까지라도...
2008년도에 루만의 세계사회론에 대해서 쓴 짧은 글에 대해서 어떤 분이 어제 댓글로 질문을 해 왔다. 검색하다보면 내 블로그 주소가 뜰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땐 묘한 기분이 든다. 한편으로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터넷을 통해서 유통되는 정보들이 대개 이런 류겠구나 하는 생각. 깊이와 질을 보장할 수 없는 그런 정보들... 그래서 그 질문하는 분에게도 학술 논문과 출간된 책을 소개해 주었다. 사실 학문은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좀' 신뢰할 만한 지식을 제공해 주기! 물론... 바로 그 신뢰때문에 계량화된 연구방법이 선호되는 것이고. 며칠 전 참석한 학술대회는 그야말로 수와 식들의 현란한 잔치였다. 여하튼... 그건 그것대로 문제삼아야 할 일이지만, 학문의 독특한 역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더욱... 학문/과학(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그래서 여전히 필요하고! (과학사회학, 지식사회학)

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월요일 오후. 따뜻한 날씨에, 사무실은 조용하고, 내 심사는 복잡하다. 모처럼 영화보고 외식도 하며 여유있게 보낸 지난 주말이 생각난다. 그렇게 주말을 잘 보내고선... 오늘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까닭이 없진 않다. 그것도 여럿...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띠끌같은 원인들이 모이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닌데... 자! 훌훌 털어버릴 것! 여느 때처럼 당당할 것!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여보게 친구
      살아있는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언 한 순간 들여 마신 숨 내뺕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것 저것도 내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데는 티끌 하나도 못가지고 가는 법이라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 묘향산 원적암에서 칩거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치던 서산대사가 85세의나이로 운명하기 직전 읊은 시

얼마 전 한국 자살률 급증에 대한 사회학적인 설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원래 크게 관심을 갖던 주제는 아니었는데 이 발표 덕분에 죽음, 자살, 노년 같은 주제에 대한 성찰, 담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종교인들에게 '죽음' 그리고 '죽음 그 이후'은 매우 민감한 주제다. 특정 종교 혹은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질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꺼내는 대표적 질문은 '오늘 저녁 당신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닌가?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주류 기독교적 접근을 가지고 있다면 서산대사의 '고백'은 한가하기 그지 없게 들릴 것이다. 천국이 따로 없고, 극락이 따로 없다니... 어렵고도 조심스러운 주제다.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이 글을 끝으로 내일 아침까지 인터넷 금식, 아니 금... 뭐냐... 금... 금촉(觸)? Anyway... 요즘 거의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 접속 상태로 지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틈틈이 수십 번 여기 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닌다. 좀 줄여야 한다. 시급하다. 일단 집에 갈 때까지 약 한 시간 금촉을 선언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들어가 본 후에... ^^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가벼움'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가벼움을 한 번 따져봐야 할 거싱다. 우선 가벼움은 무거움이 지배적인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고안된 전략이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고안된... 이 때 가벼움은 풍자, 조롱으로 연결될 수 있다. 김어준이나 딴지, 나꼼수의 가벼움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든 가벼움이 그런 종류는 아닐 것이다. 태생적 가벼움, 원초적 가벼움도 충분히 관찰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벼움은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대개 무해한 것이라 무시하게 된다. 그 밖에 습관적 가벼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말꼬리잡거나 따지는 그런 류의... 이건 좀 악성에 가깝다. 불쾌함을 남기는 그런 가벼움이다. 
같은 구조로 '무거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우물을 파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 많은 일 중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대부분 가치있는 일, 보람있는 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어떤 일이 더 가치있는 일이며 더 재미있는 일인가? 다행스럽게도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개 자신이 선택한 일 혹은 종사하고 있는 분야가 다른 일이나 분야에 비해서 더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다른 일이나 분야는 결국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이나 분야에 종속되는 것처럼 이해하고 그렇게 얘기한다. 그 얘긴 결국 다른 일, 분야 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런 일, 분야는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근대의 특성이다. '자본주의' 같은 표현들은 이미 시장경제의 우세성을 얘기하는 대표적 표현이고, 그런 예들은 무수히 많다. 과학기술사회, 정보화사회, 바이오테크 시대, SNS 혁명, 인터넷 혁명, 공감의 시대, 위험사회, 평가사회, 지식사회 등등.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이라도 다녀 온 분들은 우리의 과소비 행태에 분개한다. 장애아를 둔 부모님은 정부 정책과 사회 풍토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고. 환자자를 가족으로 둔 이들은 환우운동에 나서기도 하고. 장애인도 마찬가지. 평생 그런 일에 몰두한다. 시민운동도 마찬가지고. 그러다 서울시장에 당선되기도 한다. 통일운동, 노동운동은 또 어떤가. 황우석는 그처럼 망가지고서도 여전히 복제에 몰두하는 집념을 보이기도 한다. 뭔가에 꽂힌 사람들은 그렇다. 세상을 '필'이 꽂힌 그 지점을 중심으로 보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지. 물론 부정적 결과를 가져 올 일들에 필이 꽂힌 이들은 감사의 대상에서 제외해야겠지만. 아니  시야를 넓혀보면 그들도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악이 있어야 선이 의미를 갖게 되니까. 가롯유다도 필요하지 않은가. 여하튼... 그렇게 필이 꽂힌 이들이 각자 그들의 자리에서 일을 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세상은 어울려 돌아가는 거다. 배고픈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그 우물 파는 일을 못마땅해 하던 사람들도 우물을 파 놓으면 한 바가지 얻어먹을 수도 있는 일이고. 다만 다른 곳에서 다른 우물을 파는 사람들을 이해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쳐자보지만 않으면 된다.
자, 그럼 그대는 어디에서 어떤 우물을 팔 참인가?

2011년 11월 8일 화요일

뭘까. 마음이 편하지 않은 원인은...

페이스북?
지나친 인터넷 접속시간?
나가지 않고 있는 진도?
아니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방향상실?
어젯밤 꿈? 내 무의식?

음... 매일 매일 나를 이끌고 가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2011년 11월 5일 토요일

어제 어떤 학술모임에 참여했다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공동체' 얘기였다.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복지, 보건 등 여러 서비스들이 대개 분산되어 있는데, 결합, 연계시킬 필요가 있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근대성의 특징은 분산, 분화다. 일과 여가가 분리되고, 가정과 직장이 분리되고, 삶과 죽음이 분리되고, 기능체계들이 서로 분화하고... 그런 저런 분화는 공간적 분화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근대적 공간 재배치의 대표적 방향이 도시화다. 주거로는 아파트. 등등. 그런 분화, 분리가 그 이전 문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물질적 풍요로움, 개성의 발현 등등. 하지만 근대의 가을을 맞으면서 근대화의 풍요로움 뒷편의 그림자가 더 두드러지고 있다. 대부분 그 문제들을 해결 방식은 여전히 근대적이다. 즉, 개별적이고 분리되어 있다. 예컨대, 문제 혹은 현상 하나에 대책 하나 같은 방식... (예를 들어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에만 몰두하는 조직, 의료서비스만 제공하는 조직, 특수교육만 시키는 조직 등의 분화. 혹은 저출산 대책, 자살률 증가에 대한 대책, 장애 인식 개선, 양성평등 인식 개선 등등 같은 특정 현상에 대한 대책들) 그런 분화된 서비스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다. 그런 분리, 인간의 소외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구조가 도시다. 특히 대도시... 물론 대도시 자체가 부정적인 것으로 뭉친 것은 아니다. 대도시의 장점이 많이 있다. 익명성, 자유로운 공기 등등. 다시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서, 마을을 만들고, 공동체를 형성해서,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쉽지 않다. 근대의 장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근대의 문제를 해결, 극복하려는 시도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도시 내 공동체,  재택근무 등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고...

2011년 11월 1일 화요일

premodern - modern - postmodern

'근대' '근대성'에 대해서 얘기하기란 쉽지 않다.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We have never been modern"이란 얘기도 있으니까... 그래도 난 위의 저 매우 도식적인 저 도식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저런 도식에 기초해서 한국의 어떤 현상을 설명한다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특히, 서양의 장점, 단점과 비교할 때) 우리는 그 현상의 발생 원인을 한국 사회가 덜 근대적이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탈근대적이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전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만남!
그렇게 본다면 전근대적인 현상으로 볼 것인간 아니면 탈근대적인 현상으로 볼 것인가 이 두 입장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할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부정적으로 비치는 사건들은 대개 전근대성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근대화에 박차를 더 가하면 해결될 것처럼 얘기하고... 탈근대성으로 설명하면 사정은 정반대가 된다. 한국의 상황은 이제 선진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탈근대성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찰적 근대화' 논의 참고). 체계이론에도 그런 견해들이 있다. 분화의 결과라는...

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10월의 마지막 날... 뭐, 그렇다는 말씀.

Rising Asia! (혹은 Rising Korea!)를 얘기하자면, k-pop을 포함한 한류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이다. 우선 Glocalization의 사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유럽 등지에서 K-pop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뭔가 비슷한데 다르다'는 거니까. 공통점이 전혀 없인 아애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고, 너무 비슷하면 굳이 낯선 언어로된 문화상품을 찾아서 들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좀 더 고민해 볼 지점은 한국 문화상품이 갖는 다른 요소, 새로운 요소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맥락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근대성의 변화, 혹은 새로운 근대성의 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Asia는 Rising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Falling Asia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아시아의 현재에 대한 큰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10월 22일 토요일

결국 아직까지 진도를 별로 나가지 못했다. 아지 솔직하게 말하면 전혀... 지난 두 시간 동안... ㅠ ㅠ
그래서 이 곳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정리해 보려 한다.

결국 사회변동 경향의 이해, 설명에서  핵심은 '복잡성', 더 정확하겐 '복잡해지는 것' (복잡화)이다. '탈중심성' 혹은 '탈중심화'라고 해도 좋고. 물론 그 방향이 단선적이진 않다. 그러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복잡해지는 것'과 '덜 복잡해지는 것'의 변증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변동은 단선적 경로를 좇지 않는다. 근대화, 성찰적 근대화, 자본주의(화), (탈)산업화 같은 단순한 주장으론 이 복잡한 동학을 설명하기 힘들다). 변증법적 변동의 경로를 따라가면 복잡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엔트로피 증가). '덜 복잡해지는 것'은 그러니까 상대적이란 말씀. 물론 복잡성이 일시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지만 (쿠테타, 혁명 같은 상황), 그건 어디까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예를 들자면, 복지국가와 자본주의와의 관계 변화가 그렇다 (cf. Schimank 2011). 복잡화 (정치, 경제 분리) -> 덜복잡화 (경제 우위가 강해짐) -> 다시 복잡화 (복지국가 등장으로 경제 우위를 조정함) -> 덜복잡화 (냉전이후 신자유주의) -> 다시 복잡화 (금융위기 이후로 국가 역할 강화). 이런 관계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경로였고, 발전사회의 경우는 물론 다르다. 초기 '덜복잡화'에서 정치, 더 정확하겐 국가 우위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물론 최근에 경제우위과 관찰되지만.
이 복잡화와 덜복잡화의 변증법적 경로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구조, 양태, 경향으로 드러났다가 또 사라진다. 특정한 경향이 사회 변동의 전체적 경향인양 얘기하는 '경향'도 관찰된다 (각종 '- 사회'론 혹은 '-시대'론).
여러 경향 중 어떤 경향을 강조할 것인가? 어떤 경향을 강조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일까? 국가, 지역, 연구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자. 그럼 당신은?


Schimank, U. (2011), Wohlfahrtsgesellschaften as funktionaler Antagonismus von Kapitalismus und Demokratie. MPIfG Working Paper 11/2.

토요일을 틈타 빈 사무실에 침입하다. 무엇보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을 수 있어서 좋다. 지금은 바흐를 듣고 있고... 다른 일, 과제 때문에 한 동안 묵은 숙제를 돌보지 못했다. 오늘은 좀 해보려는데 과연 어떻게 될런지. 구름이 짙게 낀 흐린 날씨와 바흐,  커피... 잘 어울린다.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어제 서울시장 후보자 토론을 2/3 정도 보았다. 원순씨가 토론에 좀 약하단 얘길 듣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도, 인상, 내용에서 나은 점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물론 애시당초 토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셋팅'이 아니긴 했지만...
태도, 인상, 내용에선 밀릴 수 밖에 없다고 치더라도, 정치, 행정 주변부에 있었던 인물에게서 기대해 볼 수 있는 '쿨'함 마저 없다. 그러기에 '안철수 현상'은 있지만 '박원순 현상'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덕목인 '진솔함' '절심함'을 보여주는 데도 그다지 성공적이질 못했다.
원래 그 이상인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 그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 그는 자신이 가진 바를 드러내는 기술을 전혀 못 익힌 것이다.
선거과정에서 이런 저런 찜찜한 구석이 많이 드러나기도 했다 - 학력논란, '하버드대 도서관 책 완독 혹은 복사' 해프닝. 그럴 때마다 그의 태도는 '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제 토론에서도 시종일관 찌질하게 물고 늘어지는 인상이었고.
'아직도' 박빙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지난번 한명숙도 방향을 잘못 잡더니...
원순씨 주위에서 무조건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들도 공허하게 들린다.
좀 잘하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이 곳에 쫌 뜸하던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참 동안 나를 괴롭히던 발표를 끝냈고, '작은' 발표도 '성황리'에 마쳤고, 심지어 지난 일요일엔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기까지 했고 (10km), 사무실  급한 과제도 끝났고, 작은 과제도 오늘 지나갔고, 다음 과제에 매진할 때까지 여유가 좀 있다. 해서 모처럼 내 본업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감'이 영 돌아오질 않는다. 집에 가기 전까지 떨어진 '감'을 좀 끌어 올려 볼 참이다.
그건 그렇고... 날이 갑작스럽게 추워졌다. 올 해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마음은 더 추워진다.
그 학습능력 떨어지는 K팀 감독이 바뀌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이라 더 기쁘다. 내년엔 무슨 재미로 야구 보나 걱정했는데...
음... 오랜만인데 할 얘기가 그닥 없군.
뭐, 내 집이고, 또 혼자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2011년 10월 10일 월요일

'센스있고' '스마트한' 사람을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랴. (흠. 외래어를 대체할 다른 표현이 없을까? 눈치빠르다? 명석하다? 똑똑하다? 노우! [노우?^^] 이래서 외래어를 쓸 수 밖에 없다. 쩝...) 여하튼.. 센스, 스마트함을 갖춘 사람들도 그런 능력을 과신해서 학습, 개선 노력을 하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퇴보할 것이다. 반면로 애초에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학습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긍적적인 모습으로 진화해 갈 것이다. 물론 둘 다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그 때 그 때 주어지는 일들 처리하면서 허둥지둥, 바쁘게만 살아갈 것이고...
여하튼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했던 실수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들, 정말이지 지켜보기에 답답하고 안타깝다.
프로야구 K팀의 감독. 시즌 내 그렇게 지적당했던 실수를 또 반복한다. 사람이란... 참 바뀌기 어렵나 보다. 
'소심함', 그리고 '학습능력 부족'. 특히 투수 교체 타이밍에서... (타이밍?).

2011년 9월 27일 화요일

어제 저녁 약간 감성적인 짧은 글을 남겼는데 인터넷 접속 불량으로 사라졌다. 다시 쓰려면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야...
요새 이 곳은 정말이지 거의 일기장 혹은 메모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공적인 나눔을 '페북'에서 하면서 그렇게 된 듯...
얼마 전 'blogger' 관리 메뉴가 바뀐 이후로 게시물에 대한 접속 통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 첫 반응은 경악... 접속 수가 상상 이상 많은 것. 조금 더 확인해 보니 대부분 검색 결과로 내 블로그 게시물이 걸려 들었다는 의미였다. 어쨌거나 내 블로그 글이 그런 식으로라도 노출되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이 걸리긴 한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용도로 공적 공간이기도 한 이 곳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블로그나 SNS는 공적/사적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일기장으로 진화하고 있는 상황도 그렇지만, 너무도 건조하고 재미없는 그저 푸념 같은 글이 이어지고 있어서 그것도 걸린다. 쓸 거리가 없는 건 아닌데... 얼마 전 다녀 온 연주회, 최근에 본 영화들 등등... 왠지 그 쪽으로 '당기질' 않는다.

뭐, 굳이 의의를 찾자면... 블로그의 현상황 자체가 나름 개인사의 한 기록일 수도 있겠다. 2011년 9월 무렵의...

덧글) 어제 쓴 글 일부가 자동 저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워버렸다. 식은 음식 같은  문자 덩어리 같으니라구... 

2011년 9월 24일 토요일

성향 혹은 태도의 진동수

비슷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진동수 폭이 커서 내 독특한 진동수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진동수는 여러 방식으로 '측량'될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좀 구분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지식 혹은 성향의 진동수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여러 유형의 진동수 중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성향 혹은 태도의 진동수'가 아닐까 생각힌다. 비슷한 성향 진동수를 가진다면 비록 살아 온 경험이나 관심사, 축적해 온 지식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무릎을 치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다른 점을 솜이 물을 빨이들이듯이 서로 흡수해 가서 자신의 지적 자양분으로 삼을 것 같다. 지식, 경험 등 겹치는 부분이 작지 않은데도 얘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 이 성향 진동수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성향 진동수를 가진 사람들을 몇 명 꼽을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럴수록 그 몇 명의 존재가 소중하고 고맙다. 그들은 대개 겸손하고, 열려있고, 지적인 호기심 강하고, 고집도 있지만 인간 혹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상대의 말을 일단 수긍할 줄도 알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세게' 나가는 경우는 대개 내 이 마지막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가르치려 들거나, 대화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못하는 이들... 운전 중에 내가 불끈하는 경우도 대개 다른 운전자나, 행인들 배려하지 못하고 제 편함만을 생각하는 경우를 목격했을 때다 (허나 그런 경우를 직면했을 때 내 반응은 종종 시크chic하지 못하다. 반성... OTL).
어떤 경우든  성향 진동수가 맞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 그리고 불끈하는 일은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불편한 경험이다. 하지만 어쩌랴... 사람이 다 나와 같지 않고,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을... 그저 그런 경험을 내 성향이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그런 경우도 '소화'할 수 있도록 도를 더 닦는 수 밖에...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요즘 텔레비전을 보거나 뉴스를 읽으면서 가끔씩 '울컥'할 때가 있다. 최근엔 기억에 남는 일로는 학생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교사 이야기를 다룬 다큐나 '남격' '청춘 합창단'이 찾아간 청소년 재소자들이 'you raise me up'을 부르는 장면을 볼 때. 대개 나이 탓으로 돌리던데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은가? 여하튼... 오늘은 인터넷으로 확인한 기사 하나 때문에 또 한 번 울컥...야구인 장효조의 마지막 모습 얘기였다.

" 2011년 9월 7일, 프로야구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네 차례 타격왕을 차지한 장효조는 통산 타율 1위(0.331)에 올라 있는 전설이다. 프로야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고인이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깊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 장효조는 9월 5일 저녁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뭔가 생각난 듯 곧바로 부인 강경화씨를 찾았다. 아들 장의태씨도 병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장효조는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 앞이 흐릿했고 암세포가 퍼져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말을 할 힘도 없었지만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여보, 나 먼저 천국에 가야겠어. 그동안 잘해줘 고마웠어. 사랑해…." 무뚝뚝하고 자존심 강한 그도 사실은 속정 깊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장의태씨는 "평소 그런 말씀 전혀 안 하셨다. 나도 어머니도 놀랐다"고 말했다. 어렵게 입을 연 장효조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여보, 사랑해"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

2011년 9월 19일 월요일

"개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ps) 정말이지 가을이 "쳐들어" 왔다. 더군다나 오늘은 흐리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시가 어울릴 정도로 우울한 날이거나 그런 기분은 아니다. '개같은' 이란  형용구를 쓸 정도는 더더구나 아니고. 그냥 한 번 가져와 봤다. 뭐, 가을을 지내다 보면 한 번쯤 이 시가 생각날 때가 있지 않을까...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끌어올렸던 헤겔, 고전경제학, 맑스와 달리, 비판이론은 프로이트를 따라 작게는 인간 개체 크게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즉 필연성(Ananke)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종류로 본다. 노동은 원래 외적 필연성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활동이었지만, 점차 인간이 자연을 신화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전화시키는 합리적 활동으로 격상된다." (최종렬 2010, 무조건적 소모의 사회 2: 가부장적 핵가족의 내파와 사회의 에로틱화)

노동은 이제 심지어 권리로 이해된다. 노동할 권리... 일할 권리라.... 조선시대 조상님들이 봤으면 놀라 자빠졌을... 그런 탓에 국가는 장애인들이 노동할 권리를 얘기하고 어떻게든 고용시켜서 일하게 만든다. 물론 그런 국가 정책의 뒤켠엔 장애인의 물질적 토대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유인하려는 생각이 있을 테고... 물론 장애인의 노동시장 참여는 경제적 자립만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여하튼 낯설게 보일 수도 있는 풍경이다. 장애인도 일하겠다고 하고, 국가도 일자리를 마련해 주러 애쓰고...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Idealtypus'는 베버의 사회과학연구방법론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한국어 문헌에서는 대부분 '이념형'(理念型)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난 독일어로 'Ideentypus' 정도 되는 줄 알았다. 왠걸... 아마 한국어에서 '이상형'(理想型)은 대부분 '이상적인 異性像' 이나 적어도 '바람직한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베버의 Idealtypus는 그런 '바랄만한 좋은 상태'가 아닌 '어떤 사회 현상의 핵심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정한 측면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념형'이란 신조어를 선택한 것 같다 (필경 일본어 문헌에서 그렇게 번역했을 것). 하지만 그 자체로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든 '이념형' 보다는 '이상형'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想像 혹은 抽象의 형태를 가리킨다는 부연설명이 따라야 겠지만... ). 요즘 문헌에서도 주로 '이념형'이 선호되는지 확인한 바는 없지만 오늘 우연히 읽게된 홍성기 교수의 베버 소개글에서 '이상형'이란 번역어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기록해 둔다 (베버의 '이상형'. 현대 사회과학방법론의 기초).

본문 중 베버와 칸트를 연결짓는 구절이 있는데 흥미롭다.


"베버의 학문 방법론으로서 이상형의 도입은 그 연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그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으로서 현실간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한 신칸트학파로부터 현실이란 개념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을 배웠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고 개별적이며 무정형적이고 무질서한 현실에 접근하는 길은 보편적이고 반복 사용 가능한 개념을 통해서, 즉 현실을 개념을 통해 구획화, 범주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인식주관과 물자체(Ding an sich)의 간극에 대한 철학적 기원이 칸트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한편 개인의 자유와 의무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던 베버는 이상형을 도입함에 있어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앞에서 인용한 이상형에 대한 베버의 설명에서 연구대상의 몇몇 측면에 대한 ‘일방적(einseitig)’ 강조를 솔직하게 인정한 것도 바로 연구자의 주관적 가치판단이 이상형의 형성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구자의 주관적 가치판단 없이는 현실의 어느 측면도 포착될 수 없고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주관성이 분명하게 강조되지 않으면 독자는 물론 연구자 스스로 주관성과 객관성을 혼동할 위험에 빠진다고 베버는 판단했다. 즉 연구자 스스로 자신의 연구가 갖고 있는 주관적 한계를 명철하게 의식해야 하고, 오로지 이런 경우에만 그의 작업이 분명한 학문적 의미를 부여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학자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비극적 운명을 명철한 정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운명을 극복하는 영웅적 측면을 갖게 된다. 바로 이점에서도 우리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성을 지닌 미학적 판단의 이중성을 역설한 칸트와 흡사한 점을 보게 된다. 어떤 베버 연구가가 칸트는 철학자이고 베버는 사회학자이며, 두 사람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끝난다고 말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ps) Idealtypus 번역어 선택에 대해서 나와 다른 견해를 발견해서 기록해 둔다. 그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념형: M.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의 기본적 개념. 이 말은 원래 G. 옐리네크에서 유래하지만, 베버에서는 규범적 의미는 전혀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방법적 개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을 이상형(理想型)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베버에 의하면 <사회과학적 인식은 경험적 현실의 사유(思惟)에 의한 정서(整序)>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그 문화의의와 인과적 연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을 구체적인 목적으로 한다. 베버는 기본적으로 H. 리케르트의 가치관계적·개성기록적이라는 문화과학의 규정으로부터 출발하면서 그것을 더 한층 발전시켜, 오로지 개성의 기록에만 그치지 않고 문화나 사회의 개성적 특질을 보편적 연관이라는 역사적인 형태를 통하여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으로 구상된 것이 이념형론이었다." (출처: 파란사전)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권위주의 정권 시절 연예인은 도덕적 책임을 지는 공인에 불과했지만, 문화의 산업화가 고도로 발달하는 단계로 진입하면 연예인은 또 다른 지위를 얻는다. 1990년 이후 문화의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한국의 연예인은 공인이자 동시에 ‘셀레브리티’(Celebrity)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산업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가 대체하듯, 문화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스타’를 대체하는 셀레브리티는 후기 문화산업의 특산품이다. 미디어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면, 그 미디어 산업의 콘텐츠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셀레브리티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화제와 가십거리가 없다면, 그 많은 케이블 방송과 잡지와 인터넷 매체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비틀즈가 팝 아티스트였다면, 마이클 잭슨은 셀레브리티이다. 비틀즈의 새 앨범은 기사화되어 음악전문잡지 롤링 스톤즈 에 실린다. 비틀즈는 가십 전문지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 (The Sun)의 1면을 장식할 일이 없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다르다. 마이클 잭슨은 롤링 스톤즈 뿐만 아니라 더 선의 기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화제’를 제공하는 셀레브리티이다. 마이클 잭슨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마이클 잭슨을 ‘원소스멀티유스’의 대상으로 삼는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한다. 마이클 잭슨 덕택에 파파라치 사진사는 밥을 먹고 살고, 마이클 잭슨을 둘러싼 루머를 취재해 타블로이드 판 신문에 기사를 팔아먹는 셀레브리티 가십 전문 연예 기자도 있다." (노명우 (2010), '사회적 사실'인 연예인의 자살)

"하느님도 왜 이리 무심하실까
데리고 가라는 000은 안 데려 가고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장효조. 최동원을
데려가다니 ..."
감독이 팬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어떤 프로야구팀의 게시판에는 저런 내용의 글이 여럿 올라 와 있다. 무섭다.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레전드'에 빗대어 살아있는 자의 '죽음'을 '기원'하다니...

ps) 어제 ㅎ팀에 18점을 주면서 대패했다. 이런 결과와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감독이나 선수들을 이해하기 정말 힘들다. 그래도 평생 야구를 한 사람들이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야구 관전구력이 늘면서 내린 결론인데, 아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mb와 비슷하다. 두뇌용량 및 처리능력 부족이고 무능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이 순간 저 투수로 바꾸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같은 불안한 예감은 여지 없이 맞아 떨어진다. 신뢰를 줘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져 있다. 야구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팀스포츠기에 지도자에게 소통과 공감능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고 그래야 비로소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때로는 그 능력 이상을 끌어낼 수 있는 법인데... 옹호하려고 해도 장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선수들이 잘 할 때 그냥 기본은 하는 감독인 것처럽 보일 뿐... 무색무취, 안절부절....
그럴 때면 감독에게 저런 저주를 퍼붓는 팬들이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읽으려고 빌리긴 했는데 시간사용 우선순위에서 늘 밀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차례만 기다리고있는 책 한 권을 과감하게 반납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서지정보와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해 두려고 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원제: 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 저자 니콜라스 카 (Nicholas Carr)는 경영컨설턴트로 특히 IT 업계 쪽에 영향력이 있는 모양이다. 이 책의 요지는 한 마디로 '미디어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맥루한이 설파한 미디어의 영향력 담론의 업데이트된 버전 정도 되겠다. 특히 인터넷의 영향에 대해서.. 1부에선 맥루한식의 주장, 문자 혁명이 인간 사고를 확장시켰다는 얘기. 2장은 인터넷이 생각을 넘어서 뇌 구조까지 바꾼다는 얘기. 대개 인터넷 사용 이후 인간 뇌는 산만해지고 집중력이 분산되고, 온라인상 습관이 다른 구매체 사용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컴퓨터, 인터넷이 뇌의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무척 우울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고 설득력이 없지도 않다. 과도한 신미디어 예찬론자들에게 꼭 읽혀주고 싶은 이야기다. 하지만 신미디어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들 못지않게 비관적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기술결정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그런 결정론적 사고에 큰 짜증이나 때론 분노까지 느끼는 편이라... 쓰고 보니 그렇게 오랫동안 내 책상 위에 놓여있을 필요가 없었던 듯. 제대로 읽지도 않고 너무 악평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쏴리.. 미스터 카!

2011년 9월 8일 목요일

결국 '사회변동'이고 '사회변동론'인가? 굳이 따지자면? 그래... 그게 가장 가깝겠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슨 사례를 가지고서 어떤 변화를 보여주겠다는 건가?
도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사방이  산이고 난 그 속에 길을 잃은 채 갇혀서 옴짝달싹 못할 처지인데 해까지 저물고...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justice)'라고 했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라인홀트 니버 이야기를 유시민이 정리, '국가란 무엇인가')

감동할 땐 감동하라고?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양보한 일과 관련해서 '페북친구들' 간에 가벼운 설전이 있었다. 한 쪽에서 왜 그리 안철수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다른 쪽에선 '감동할 땐 좀 그냥 감동 좀 하게 놔두면 안되냐. 가르쳐들려고 하지 말고...'라며 발끈...
둘 다 이해는 하지만 난 앞에서 언급된 친구 편이다. 물론 사사건건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을 내가 좋아할리는 없지만, 이런 경우엔 좀 가르쳐도 된다.

"감동 좀 하자"는 얘긴 2002년 월드컵 무렵에도 들은 것 같다. 그 무렵 일부 좌파들이나 인권운동가들이 지나친 스포츠 애국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하자 그들에 대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 김어준 같은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강팀이다'라는 '타이틀'을 걸고서 화끈하게 스포츠 애국주의 전사가 되셨다. 화끈한 것 좋아하는 민족이라서 고민하고, 좀 조심스럽게 성찰하는 모습을 못 참나 보다. 자학한다고 생각하는 듯...
물론 감동해야 할 때가 있다. 분노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내 기준에서 볼 때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 같은 경우, 적어도 그 시점에선 아무리 감동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진짜 좌파 입장에선 그 경우도 좀 온건한 우파의 득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바'가 일상화되고 예측가능성이 낮은 나라라서 감동할 일이 많은 지도 모르겠다.

2011년 9월 7일 수요일

오늘 건진 생각...
삶의 시작과 끝을 예측하거나 가늠하기 힘들 때... 그래서 개입하기도 힘들고 그저 받아들여야 했을 때... 인간의 계산이 닿지 않는 신비로운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운명... 이는 동시에 보호받는 영역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언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지 그리고 생명을 언제 마감할지 알 수 있게되고, 그래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질수록 그 신비로움은 깨지기 시작한다. 이제 출생과  죽음은 인간 아니 사회가 보호해야 할  영역이 되었다. 생사여탈권은 이미 많은 부분 개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유달리 낙태나 복제, 배아연구 그리고 다른 쪽에선 안락사나 같은 극단적인 주제에 그렇게 큰 관심이 쏠리는 현상은 바로 그런 부분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그 극단적 경계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이건 뭐 난리도 아니다. 생명의 탄생과정에 대한 개입,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개입.... 엄청나다.
이것이라도 보호하자는 사회 안전성 유지의 마지막 몸짓인 것이다.

안락사나 낙태, 배아연구 같은 주제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런 극단적 주제에만 관심을 가질 때 그 극단적 경계 안쪽의 현상들을 용인하는 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다만, 자살은 좀 구별되는 현상인 것 같다.
'수정'부터 '죽음'까지 생명의 전과정을 국가와 사회가 관리하는 시대에 자살은 그런 관리를 거부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생체권력은 어떻게든 강제적으로 때로는 규율, 내면화를 통해서 어떻게든 살도록 (bio) 살아가도록 살아내도록 애를 쓰는데, 그 때문에 그런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이기도 한 자살은 더 특별한 예외적인 위협적인 위기의식을 만들어내는 현상인 것이다.

2011년 9월 6일 화요일


천선영 교수의 매우 흥미로운 논문 "자살의 이유를 알아야 하는 이유: 근대적 자살 이해에 대한 사회이론적 논의" (2008).

"이 논문의 질문은 왜 자살률이 증가하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궁금증의 초점은 근대사회가 자살의 이유 발견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또한 왜 어떤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 과정 안에서 자살이 점점 더 민감한 사
회적 사건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자살의 이유 찾기에 열심인 이유에 대한 하나의 사회이론적 대답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p.294f)

캬~ 멋진 문제제기다. 이런 문제설정은 자살 (혹은 넓게 보아 '죽음') 반대 쪽에 있는 주제, 즉 "생명은 어느 시점부타 생명인가?" 같은 인간의 시작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고, 그 두 질문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한 마디로 정치 혹은 권력의 속성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푸코 근대권력론에 기초하여서...
전통사회에서의 권력은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상징했다. 그러므로 자살은 일반적으로 범죄였다. 이런 죄는 단죄를 하면 그만! 하지만 전통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근대사회의 권력은 삶을 낳고 증대하고 조직하는 생체통제권력(bio-power)이 되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인 사회가 도래하면서 자살은 사회 해체를 낳고, 사회 전체의 '가장된' 안정성 유지를 위협할 우려가 있는 주범이 되는 셈이라는 것.

 "특정 영토 내 전 구성원들의 안전보장을 그 이상으로 하는 근대국가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자살은 이제 자신의 통합 근거에 대한 직접적인 의문 제기 내지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사회는 자살의 이유와 유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자살이 근대의 신생 학문인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인간 행위들 가운데 하나가 된 중요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p.307:)

그 밖에도 '자살'에 대한 이런 저런 흥미로운 얘기들이 이어지지만 생략.

10월 어떤 작은 학술 모임에서 자살에 대해서 얘기해야 하는데 더 붙이거나 뺄 것도 없이 이 견해를 소개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험상 착상을 이렇게 빌어와서 머리 속에서 굴리다보면 좀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되긴 하지만...

2011년 9월 5일 월요일


아래 어디에선가 쓴 적이 있지만...
(스스로 평가하기에) 난 균형을 잡으려는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안철수를 '약간은' '깍아내리려는' 내 심리상태는 어쩌면 안철수 지지자들의 찬양 발언들에 자극받아서 형성되었을 수 있다 (특히 페북에서... ).
만약에 안철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세였다면 난 반드시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라고 강변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좌에서 우까지를 섭렵해서 균형을 잡으려 들 정도로 줏대가 없거나 오지랍이 넓은 건 아니니 나름 '진동'하는 범위의 경계는 형성되어있다고 봐야겠지만...

내 균형잡기 혹은 좌충우돌, 이랬더 저랬다 하기, 일관성 부족의 대표적 사례가 소셜미디어의 의미, 정치의 진화 방향 등에 대한 내 견해다.
그런 성향 때문에 미래 변화를 섣불리 예견하거나,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보다는 (따라서 그런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지), 역사의 흐름을 기초로 현실을 판단하는 일, 그리고 기존의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 성찰을 제공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 루만과 체계이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고. 루만은 예측, 예견을 피하는 편이었거든.
오늘 발견한 디르크 배커(Dirk Baecker)의 '미래 사회에 대한 16가지 테제'(Zukunfutsfaehigkeit: 16 Thesen zur naechsten Gesellschaft) 는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체계이론가로서는 드물게 참으로 과감하게 미래 사회의 모습을 예견해 본 것.
번역해 볼 생각...
오마이뉴스 안철수 인터뷰를 보고서... (여기)

한 마디로.. 대기업 경영 등 이런 저런 것 해 봐서 안다는, 잘 할수 있다는... 익숙한 '톤'아닌가? 2mb나 문국현씨 같은...
그리고 서울시 소프트웨어 개선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도 대개 전문가로서 서울 생활하는 이가 평소에 가질 수 있을만한 그런 아이디어들...

아래는 그런 맥락 속에서 페북에 썼다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운 내용:

독재는 대개 정치혐오증을 먹이삼아 자라난다 (행정국가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물론 항상 그런 극단적 결과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정치혐오증이 좌우를 넘어선 제 삼 세력의 정치화나 생활정치 등으로 표현되면서 민주주의의 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가능성' 정도인 것 같지만... '전문가정치' 역시 전문가, 전문지식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기초로 삼고 있는 생각 아닌가. 플라톤의 국가론 생각이 나네. 그건 정당정치, 이념정치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을 포함한 비전문가를 배제하는 정치 모델로도 연결된다. 한마디로 정치에 대한 이해수준이 너무 낮거나 아니면 논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것. 감성정치, 공감정치라고 하면 얼추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겠다. 서울시 시정은 그런 차원에서 끌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막상 시장이 되더라도 금새 꼼짝달싹 못하는 식물 '행정가'가 되기 십상이다.


벗뜨...
계속 연재되고 있는 인터뷰를 보면서 헷갈리는 것도 사실.
그가 정말 시장이 된다면 꽤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나도 설득당하고 있는 중~)
이러다가 정말 시장선거에 나와서 당선되는 것 아닌가?
내가 소셜미디어의 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건 아닌가?
정치의 변화, 진화에 대해서 너무 보수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꽤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이미 시작된 것 아닌가?

하지만 그가 과연 당선될 수 있을까? 더 본질적인 문제는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
그가 서울시장으로 무혈입성하기 힘든 구조적 문제...
단독 후보로 나서면 한나라당에게 좋은 일 시켜주는 일임은 분명하니 (그래서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고) 야당 통합 단일 후보가 되어야 할텐데... 그 과정에서 그는 상처만 입고 낙마할 가능성이 크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걸까? 과연 통합 단일 후보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관전포인트'를 그 쪽으로 옮겨야 할 지도... 
9월이다. 아니 9월이 지난지 '꽤' 되었지만 월요일라서 그런지 왠지 새로운 기분이다. 아! 날씨가 '급' 시원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철역에서 내려 출근번스를 타지 못하는 날엔 마을버스를 타야하고 그럴 땐 정류장에 내려서 한 6,7분 정도 언덕길을 더 걸어 올라가야 한다.   햇볕을 맞으면서... 오늘도 햇살을 꽤 뜨거운 편이었고 도착 후 많은 땀을 흘렸지만 날씨가 달라졌다고 느낀 게 땀이 금새 말라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늦더위에 약간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워낙 비가 많은 여름이어서 뜨거운 햇살이 반갑기도 했다. 과일이나 곡식 생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이제 하루가 다르게 건조해지고 서늘해지는 날씨가 또 반갑다.
어젠 가을맞이 공사를 벌였다. 우선, 볼품없이 자라고 있어서 내 눈총을 받던 야자수(?)를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너무 자라서 화분이 작아보이는 파키라를 그쪽으로 옮겨 심은 것. 최근 화분 옮겨싦기를 몇 번 시도해서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는데 이번에도 느낌이 좋다.
그리고... 숙원사업이었던 옷장 정리를 했다. 여름 옷 철수시키면서 이참에 쏴악 정리해버렸다.
맥북도 좀 정리했다. 윈도우 시절에 쏠쏠한 재미를 보면서 쓰던 영어, 독일어 사전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설치한 것. 그리고 마음에 쏙드는 마인드맵 프로그램을 만났다. 그 동안 마인드맵 프로그램을 여러 종류 써 봤는데 (거의 10개...) 모두 아쉼을 남겼는데 이번에 만난 녀석은 딱 내 스똬일이다. "MindNode Pro" (상용버전인 Pro를 취득 경로는 음 영업비밀...).
급한 업무는 지난 주 해치워서 적어도 오늘, 내일은 내 공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실 고실한 날씨에 점점 내 스똬일로 최적화되어가고 있는 노트북으로...
아, 한 가지 고백을 좀 해두자면... 요즘 깊은 잠을 못자고 있다. 아무리 '행복전도사'임을 자청해도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선 다른 '내'가 잠복 중인 모양이다. 근원적인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할 모양이다. 빨리...

2011년 9월 3일 토요일

정치적 견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내는 이런 글은 '페북' 같은 곳에 올리기 조심스럽다. '보복'당할 걸 염려해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이야기로 독자의 영혼에 끼치는 폐를 최소화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이곳의 소수의 독자들에겐 죄송. 꾸벅). 더군다나 나와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라면 내 글 읽은 뒤에 원치않는 '부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기에...
안철수 원장과 박경철 원장, 그리고 작가 이외수, 김정운 교수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 저녁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경철님이 초대되었다. 우연히 듣기 시작해서 글쎄 30분 정도 들었을까, 더 이상 듣지 못하고 껐다. 왜? 재미가 없어서. 경철님 얘기는 그 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서 들었던 터였고 그냥 '착한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철수님과 같이 대학생들에게 강연을 다닌다는 얘기도 들었고, 김제동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한 걸 보기도 했었고...
어제 얘긴... 대부분 그저 그런 일상적이고 소소한 감상이었는데 뭐랄까 도덕선생님의 목소리 같았다. 혹은 수필가... 따뜻한 얘기, 좋은 얘기만 하고 있어서 지루한... 좋아하는 단어가 '살갑다, 그립다'라든지... 조영남의 노래 '모란꽃?(동백꽃)'에 얽힌 이야기랄지...
그러면서 그와 단짝인 철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하겠다는... 오세훈의 전시행정이 아닌 인프라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문국현'스러운 출사표!
그들이 청년들의 상담가를 자처한 건 참 보기 좋았는데 왠지 그런 적극적 사회 참여가 그들에게 과도한 책임과 정의감을 불러일으킨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백만 팔로우어를 가지고 있다는 이외수님도 최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맡으셨던데... 그것도 요즘 매스미디어 노출을 무척 즐기시는 김정운님과 함께...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도 도를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개 호응을 얻으면 거기에 취해서 도를 넘게되기 쉽다. 네 분 모두 적절한 시점에서 물러나거나 새로운 일을 해보길 추천드린다.

난 강호동에 대해서 특별한 호불호의 감정은 없는데 맡은 프로그램이 정상일 때 거기에서 내려오는 그의 '철학'만큼은 참 마음에 든다. 나야 아직 뭐 정상 근처는 커녕 제대로 등산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지만 조심해야 한다. 특히 '도덕선생화'되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늘 긴장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가늘고 길게 가는 유희열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모름지기 가볍고 유연해야 다치지 않는 법이다. 주제가 무거울수록 가볍고 경쾌하게 표현해야 하고 (좋은 예, 이태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1997'), 운동할 때도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

"The social sciences in general have been unable to deliver on their promise to explain social phenomena in terms of law-like generalizations and, in consequence, to justify technicist claims to expertize in all things 'social'"

(Smart, Barry (1991), Sociology, Ethics and the Present, in: Thesis Eleven 30: 133 – 147. p.140)


사회학 위기의 원인이고, 경제학자들이 그나마 전문가 대접을 받는 이유다 (law-like generalizations). 복잡한 세상. 전문가들에게서라도 뭔가 분명한 대답을 듣기 원하는 것 아닌가? 설령 크게 틀릴 지라도,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은 것 아닌가?어쩌면 그런 점에서 과학과 종교는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복잡한 것을 복잡한 그대로 드러내는 학문 혹은 종교에 대한 요구도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도 같다. 좀 더 성찰적인 사람들에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길 듣고 싶어하는... 대답, 정담, 해결책이 아닌 '질문'을 듣길 원하는 욕망... 포스트모던 과학/학문과 영성 추구하는 종교적 경향은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현대 과학/학문/종교는 이렇다! 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 서로 상반, 상충, 모순되는 경향의 공존! 그게 바로 현대성이다.

같은 면 몇 줄 아래에...

"As Macintyre observes, amongst other things, from the potential volatility and reality-generating capacity of (human) agency. From the fact that 'the unpredictability of certain of his own future actions by each agent individually generates another element of unpredictability as such in the social world'"

정확성, 엄밀성, 법칙은 곧 예측가능성의 다른 표현이다. 사회학의 예측가능성을 뚝 떨어뜨리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든스 얘기였던가. 사회학의 어려움은 바로 인간이 말을 하는 데 있다는... 얼마나 감사한가 (사회학도로서)! 동물들의 얘길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2011년 9월 2일 금요일

세계 여러 곳에서 다문화주의를 얘기하지만 겉으로 비슷할 뿐 그 접근방식은 다른 듯.
개인주의, 인권, 자유주의 등의 관점에서 다양성 인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그런 전통이 부족한 곳, 즉 집단주의가 강한 곳에선... "우리 사람"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한국).
흥미롭게도 최근에는 원래 그렇지 않았던 곳에서도 '지배문화' (Leitkultur)로의 통합이 대세인 것 같다 (유럽, 대표적으로 독일, 프랑스 등등)

2011년 8월 31일 수요일

요즘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헨리 나우웬의 "Bread for Journey"를 읽고 있다. 매일 묵상용으로 쓴 짧은 글 모음이라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기에 딱 좋다.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 읽은 내용이 특별하게 다가와서 일부 옮겨 놓으려고 한다.

생명과 죽음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The most important question is not 'Do I kill?' but 'Do I carry a blessing in my heart or a curse?' The bullet that kills is only the final instrument of the hatred that began in the heart long before the gun was picked up."

수십명을 죽인 노르웨이 테러범 베링 브레이비크도 총을 쏘기 이전 오랜 시간 동안 그 속에서 증오오 미움을 키워왔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욱'하며서 '성질'이 나온다면 - 예컨대 다른 운전자들이 내 신경을 건드릴 때나, 내가 응원하는 팀이 정말 '거지같은' 플레이를 할 때 등등 - 그 이전에 내 속에 쌓여 있던 이런 저런 미움이 발하는 걸 게다. (실제로 총을 들지 않았더라도 미움은 그 자체로 이미 살인이다).

"But God asks us to choose life and to choose blessing. This choice requires an immense inner discipline. It requires a great attentiveness to the death-forces within us and a great commitment to let the forces of life come to dominate our thought and feelings"

훈련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미움과 살의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살펴보면서, 또 마음과 감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하면서 훈련시키는 수 밖에...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문제는 다시 도덕성이다. 근대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취하는 사회에서 정치는 선악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물론 정치적 경쟁자를 '적'으로 생각할지라도 공적으로 그런 표현을 써서는 안된다. 여하튼 정치계에선 동료아니던가. 누구든 선거 결과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선'이거나, 선거에서 떨어졌으니 '악'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정치만큼 도덕화하기 쉬운 분야도 드물다. 도덕화는 개인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고, 선인지 악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 집단 자체가 도덕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종북세력'이나 '극우세력' 같은 표현들이... 가끔씩 - '간첩단 사건' 처럼 - 실체적 불이익, 대미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여하튼 도덕화는 개인을 대상으로 할 때 직접적 효과를 발휘한다).
도덕화, 특히 개인에 대한 도덕화가 관찰된다는 것은 흥미롭게도 제도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경쟁 상대, 집단을 도덕화하기 쉽지 않은 경우, 개개인의 행동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여 '나쁜' 인간/인격으로 몰아붙이기.. 그가 속한 집단에 타격을 주는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인 방식이다.
도덕화에서 취약한 집단, 공격을 쉽게 당하는 이들은 주로 '가진' 집단들이었다. 덜 가진 자들이 제도적 권력에 진출하면서 그 동안 도덕화로 짭짤한 재미를 봤던 그들이 오히려 더 도덕화에 취약하게 되었다. 가카는 그 많은 도덕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푸른 지붕 아래로 들어가셨고, (관대해진 것이고), 이제 도덕화로 재미를 보는 쪽은 오른쪽에 치우친 이들이다.
여하튼 도덕화는 선/악에 대한 공통의 기준을 '상정'하는 것이고 - 그래야 비판이 의미가 있으니까... - 윤리화는 서로 다른 기준이 있음을 인정하자는 쪽이다. 그런 정의를 따르면 정치는 '윤리화'되기 쉽지 않다. 시장, 혹은 자본주의 경제 역시 도덕화하기는 쉽지만 (사회적 책임 강조 같은) 그것을 윤리화한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니면... 각종 윤리위원회의 존재는... 다른 판단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인가? 그런 걸 두고 윤리화라고 할 수 있을까?

2011년 8월 29일 월요일

불분명한 것들을 참기 힘든 시대의 교회!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이견을 참지 못하는 개발독재, 발전주의자들!! "해 봤어? 해 봤냐고..." "안되면 되게 하라!!"
정답을 찾기를 강요하는 교육도 마찬가지고!
엄마, 아빠 말 잘듣도록 온 나라 어른들이 강제하고 훈육하는 사회!
불확실성, 의문, 불가지성 등등은 설 자리가 별로 없다.
아무리 과학 패러다임이 바뀌었네 뭐니 해도...
그것 자체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포스트모던 종교나 영성의 영역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학문의 의미를 '해석'에서 찾기 시작하면...'확실성'이 아니라...

2011년 8월 25일 목요일

"동양에서 뱀은 정말 상서로운 존재다. 중국 고대 신화의 복희와 여와(아래 그림)는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뱀이다.
우리나라에선 어떤가? 집에 구렁이가 들어오면 경사로 쳤다. 왜? 뱀은 쥐를 잡아먹으니까.
쌀농사를 짓는 정착 농업 문명인 동아시아에서 쥐는 인간이 먹기도 모자라는 쌀을, 그 힘들게 1년 내내 온갖 정성을 들여야만 수확할 수 있는 쌀을 빼앗아먹는 최고로 얄미운 짐승이었다. 그 쥐를 잡아먹는 뱀은 당연히 인간에겐 이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뱀은 그래서 중요한 문화상징이 됐다.

반면 한곳에 머물러 식량을 재배하지 않는 유목문명권에서 뱀은 사악한 이미지의 대명사였다. 신의 섭리란 동물들에게 다리가 있는 법인데, 다리도 없는 기괴한 모양이니 불길하게 보였고, 이런 관점은 기독교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악역으로 뱀을 캐스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뒤로 뱀의 이미지는 정말 최악으로 낙착됐다. 그래서 <해리 포터>까지 뱀은 주구장창 최악의 상징이다
."

내가 즐겨 찾는 한겨례 구본준 기자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이다. 무식해서 용감해지지 않으려면 - '하나님, 서울시민 다 투표하게 하소서' 같은 기도를 한다던지... - 마음을 열고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며칠 전 전자우편을 통해서 받은 광고 속에 등장하는 문구들. 이걸 읽는 순간! 손발 오글거림은 물론 온몸의 감각들이 일제히 기립하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 찬양감상이용권을 구입하시면 벨소리가 무료!"
"최고음질의 찬양감상과 함께 최신찬양을 벨소리로 설정하고 선물하세요. 언제 어디서나 은혜로움이 넘칩니다."


뭐... 전업 CCM 가수들, 뮤지션들과 또 그들의 음원, 음반 등을 유통하는 이들 역시 먹고 살아야 하고, 그 소비자는 대개 '교인'들이니까 저런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좀 덜 오글거리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less is more...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아시아 지역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강력한 국가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공존하는... '국익'을 위해서 난자까지 기꺼이 기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과 얼굴뼈 깍는 걸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할 수만 있다면 더한 수술도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그런데... 이건 예외적인 상황으로 볼 일이 아니다. 정통 혹은 본류가 서양에 있고 아시아는 예외적이어서 조금 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기에 지금 상황은 덜 따라잡은 상태인 게 아니란 말씀. 근대화의 모순의 가장 발전되고도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이처럼 대중가요들이 무더기로 ‘19금’ 목록에 오르게 된 것은 여성부가 이번에 유해물 심의를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 음반의 유해물 여부는 청보위 모니터요원의 기본 검토와 음반심의위원회(음심위)의 1차 심의를 거친 뒤 청보위가 매달 본심의를 열어 결정한다. 음심위 위원장은 기독교 음반·서적을 주로 펴내는 ‘라이트하우스’ 강인중 대표가 맡고 있다. 강 대표는 '대중음악, 볼륨을 낮춰라'라는 책을 쓰는 등 대중음악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기사 '술·담배 노래가사탓 약물남용? ‘취중진담’ ‘술이야’ 편곡도 19금' 중)

대중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할 때 쓸 소재들이 늘어나는구나.
새벽 1시 반... 잠들지 못하는...
와인... 붉은...
라디오... 유희열...
오늘은 음악을 계속 들려주는 날... 재수...
윤종신, 장기하와 얼굴들에 이어 디어 클라우드...
맥북에어... 날렵해서 무릎 위에 놓고 치기 좋은...
열린 창문... 9층...
맞은 편 52동... 어둠 속 창문을 통해서 나를 향하고 있을지 모를 시선...
초가을 바람...
적당히 듣기 좋은 자동차 지나치는 소리...
신호등으로 양 쪽이 막힐 때 찾아드는 조용함...
4분의 1 정도 보이는 달...
저 멀리엔 하얀 십자가...
그리고...
오늘... 아니 어제 겪었던 여러 일들...
내일... 아닐 오늘 해야 할 일들...
앞으로 수개월 내에 해야 할 일들...
그리고 내 나이...
갑자기 찾아 온 가을이, 그래 이건 분명히 가을이야, 무척 당황스러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거든...
손님을 태울 수 있음을 알리는 빨간 표지가 선명한 택시들...
이 시간에 누굴 태울 수 있을까...
아, 어쩌면 방이동 먹자골목 쯤에선...
페북에서 내 정보를 보는 이들이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해서 프로필에 있던 소개글을 지웠다. 그래도 역사인지라 여기에 남겨둔다. 여긴 당분간 나와 소수를 위한 공간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을 듯.

신미디어 학습때문에 이 곳에 자리를 마련해 두긴 했지만, '本家'는 따로 있습니다.
http://teutosworld.blogspot.com
하긴 요샌 그 집도 방치해 두고 있다시피해서 잡초만 무성할테지만...
(some months later... 최근엔 좀 가꾸고 있다 ㅋ)

2011년 8월 19일 금요일

난 생각 없이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좀 유하게 표현해서!). 운동은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 절대! 네버! 특히, 야구같은 경기는 정말 지적이고 매우 심리적인 스포츠다. 공 하나 하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런 상황의 변화를 읽고 그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선수들, 감독들을 보면... 참... 한심하다 (물론 그 상황, 플레이에 대한 전문적 해설이 그런 판단을 하는 게 결정적이 도움이 된다 [해설가 중 허구연, 이순철을 높게 평가한다]. 내가 야구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생각없이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지 않는다. 이전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다. 타고난 야구 지능이 떨어지면 학습 능력이라도 있어야할 텐데 둘 다 모자라는 경우는 정말이지 '민폐'다. 야구를 보다보면 그렇게 호/불호가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고, 중계 사이트 '응원글' 남기는 곳은 그런 감정이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배설되는 아주 지저분한 공간이다. 때론 내가 하고 싶은 얘길 대신 해주니 속 시원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결국 남는 건 씁쓸함이다.
도대체 그들에게 그런 악담, 저주를 퍼부을 권리를 누구에게서 부여받았단 말인가? 공인? 그 알량한 공인 타령? 공인이기 이전에 그들도 인격이다. 인간이다. 야구장 바깥에선 하나같이 모두 귀한 자식, 부모, 남편이다.
비록 직접 대면하진 않는 '공인'이라 할지라도, 때론 그들에게서 보고싶은 것만 볼 지라도, 그들과이 관계는 Ich-Es가 아닌 Ich-Du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동수 振動數'(여길 볼 것)가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도 없을 터.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물론 사람의 '진동수'엔 조정의 여지가 조금은 있는 법이기에 조율해 보려고 애를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실패할 때가 많고 그러다보면 '좌절감'을 맛보기까지 한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느끼게 되는 두 가지.
- 우선, 내 진동수가 아주 평범한 편은 아니라는 것.
- 그리고, 나와 비슷한 진동수 가진 사람을 드물지만 만날 수 있고 또 교류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연예사회학 (1)

한예슬 사태로 다시 공론의 대상이 된 드라마 제작 현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전제작이 최선인가? 사전제작을 못하는 이유가 제작비 때문인가? 질문을 바꿔보자. 시청자로서 당신은 사전제작된 드라마를 보고 싶은가? 글쎄...'그렇다'라고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맘대로 해석...). 거의 생방송처럼 제작되는 드라마가 반드시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생방송 드라마의 장점은 꽤 많이 찾아낼 수 있다.
- '라이브' 공연이나 '리얼리트 프로그램'이 주는 현장감
-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서 극 전개에 이미 참여할 여지까지 있다. (참여지향적 시대정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드라마 제작 방식 아닌가)
- 이번 사건도 그렇지만 드라마 제작과 관련한 사건이 기사화되면 드라마 홍보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등등.
한마디로 내용상 허구인 드라마의 이야기와 '리얼'인 드라마 제작현장의 이야기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효과!
내가 제작사라면 돈도 절약하고 홍보 효과도 얻는 이런 방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게 스탭과 배우들에게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강도의 노동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선 안되겠지만, 내 말은 사전제작만이 최선은 아닐 수 있고, 한국식 드라마 제작방식이 어쩌면 대중이 드라마나 여러 티비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현장감, 참여 등의 요소를 포함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면서 생각나는 게 '프로 스포츠', 예를 들어서 프로야구.
프로야구는 야구장 내에서 벌어지는 게임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와 프로야구 경기, 선수, 선수단, 감독, 방송 자체 등에 대한 장외 이야기들이 버무러지면서 최대 효과를 만들어 낸다. 경기 자체로 즐긴다? 사회 현상으로서 야구를 보자면 그건 전체 야구 커뮤니케이션의 '밑밥'(혹은 '쏘스' [sauce가 아닌 source]) 정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2011년 8월 18일 목요일

'한국은 해괴하게도, 피사용자가 사용자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전도현상이 너무 보편화되어 있다.'

한예슬 '사태'에 대해서 한 문화평론가(겸 교수)가 쓴 글에 나온 구절이다. 제작사 입장에서 한예슬 행동을 비판하는 '시청자들' (피사용자?)들을 가리키면서... 백번 공감!! 누구와 얘길 나누다가 들은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 얘기가 떠 올랐다. 서울을 강남과 강북을 대개 구분하는데, 강북이 낙후되었다고 해서 강북 우선 정책을 펴는 걸 막상 강북 주민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왜? 그들도 언젠가는 강남에 가서 살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희망 때문에 지금 강북 생활을 꾸역꾸역하고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와 직접 비교할 순 없다. 피사용자들/시청자들이 언젠가 사용자인 제작자가 될 기대를 가질 리 없으니까.
- 노동자들이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현상
- 노동자들 혹은 중산층 이하 시민들이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해서 사용자, 정부 편을 드는 현상

(...)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 잠시 후퇴....
며칠 전에 이런 얘길 남겼다.
- 애플의 아이폰이 천재의 창조물로 보이는 이유는 단지 그 제품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 인재니까 성공하는게 아니라 성공했으니까 인재다
여기에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게 아니고) '는 얘기를 덧붙일 수 있겠다.
바로 밑에선 '진리/진실'의 복수성 (複數性)을 거론했다.
이 둘 같은 논리 구조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다.
난 역사가 하나의 정점을 향해 간다거나, 유일무이한 진리가 있다는 주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라고 얘기하는 것도 너무 단정적이라 피하고 싶다. 왜? 그렇게 믿을 때도 있거든...).
'역사는 과거와 현대의 대화'라거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거나... 바로 그게 '진실'에 가깝다고 믿는다 (크흐! '진실'이라...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결국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해석자의 입장에서 다른 현실, 역사, 진리가 구성되는 것이다.
'근대성'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 태동한 '근대성'.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고서 그 방향으로 가는 '근대화'만이 '진리'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비서양 지역 담론을 지배했고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그러하다 (최신 버전: "선진화"). '진리의 복수성' 그리고 '해석된/구성된 진리'라는 테제에서 설명하자면 이 같은 근대성 이해는 '서양이 발전했고 성공했으니까 그 서양의 특성을 근대성이라고 부르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근대성'은 그리 긍정적인 측면만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이룬다.
여하튼... 언제 다시 역전될 지 모른다. 만약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서 세계 차원에서 패권을 잡는다면... 강한 중국을 가능하게 한 것들을 또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중국 (혹은 아시아 국가들)을 발전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비근대적이고 비서양적인 요소들이 '기적'의 원인으로 칭송될 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아시아적 가치' '유고 자본주의' 논쟁이 있지만...).
역사와 역사 해석은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그 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은 (어떤 형태의 진리이건 간에....) 이 복잡함을 처리하는 매우 손쉬운 방식일 따름이다.

진실들...

진실 혹은 진리는 단수로 존재하지 않는다. 늘 복수다. 진실들, the truths, die Wahrheiten... 등등 (cf. 내 다른 글).
한예슬 사건이 그렇고 김성근 감독 퇴진이 그렇다. 누구나 다 진실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진실을... '실체적 진실'이 아애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까지 부정하면 우린 한 순간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들다 (ex. 돈을 빌려 줬는데 다음날 상대방이 왈: 오늘의 나는 어제와 나와 다르다. 그러니 돈을 갚을 책임이 없다. 그런 극단적 경우는 배제하자는 말씀) 대놓고 거짓말'치는' 이들이 '진리의 복수성' 운운할 수 있는 여지는 남기지 말자는 얘기다.
여하튼 실체적, 객관적 진리, 진실의 가능성을 최대한 넓혀 놓은 다음 그 토대 위에서 진실의 복수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한예슬, 김성근... 모두 그런 경우라고 본다. 어쩌면 그들의 논쟁은 손가락일 뿐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또 다른 진실, 어쩌면 더 알 필요가 있는 진실이 숨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아웅다웅하면서 놓치는 그런 진실 말이다.

'최종병기 활'(2011)을 보다.

감독은 김한민. 그의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은 괜찮았고, '핸드폰'도 나쁘지 않았다. '활'에서는 한 단계 오른 역량을 보여준다. 오락영화 (혹은 '액션활극')를 지향하는 이 영화는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딱 필요한 만큼만 역사를 이용한다. 역사를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적절하게 숨어 있다 (심지어 '나라'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그럴듯한 성찰까지...). 주요인물 중 유일한 여성인 '남이'가 유약, 순정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점도 신선하다.
몇 가지 흠을 잡자면, '만주어'어가 매우 충실하게 재현되는 반면 조선사람들이 쓰는 말은 '현대 한국어' 느낌이 충만하다. 화살 날아다니는 모습이 탁월한 반면, 호랑이 CG 장면은 너무 허접... 개성에 살던 사람들이 압록강 주위 지형을 너무 잘 아는 설정 등등.
결론적으로, 역사에서 소재를 취해서 만든 '오락영화'의 '좋은 예'! (빠른 전개, 긴장감... 이런 점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역사'를 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점에서... 대표적 나쁜 예는 '디 워' ㅠㅠ).

낯익은 장면들, 이야기 전개 방식의 출처를 오마이 뉴스 리뷰 기사는 '서부영화'에서 찾는다. 그런 것 같기도...

"'최종병기 활'은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철저하게 할리우드 방식을 따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결론을 향해 치달아간다. 그래서 미국영화 공식에 익숙한 한국관객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다. 가족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주제나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 총잡이들의 일대일 대결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서부영화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2011년 8월 17일 수요일

두 가지 부담을 극복하고(^^) '문재인의 운명'(2011, 가교출판)을 읽다. 두 가지 부담이란, 우선 엄연한(!) 근무시간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로는 시간이 있을 때 최고 우선순위를 배당받는 과제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점.
여하튼... 오백쪽에 이르는 내용을 모두 읽을 순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책이라 군데 군데 읽어 보았다. 읽고 나니... 먼저 노무현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데 한번쯤 봉하마을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요즘 '문재인 대망론'을 많이들 얘기하는데 그림이 썩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노무현 대통령 당선되었을 때의 감동이 있을 것 같다는... 아니 퇴임 이후가 오히려 더 기대되는 그런 대통령일 것 같다는... 그가 운명처럼 만나게 된 노무현처럼...
오바마 형님이 요즘 고전하시는데, 막상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동안엔 대개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다. 현실 정치의 한계 때문이다. 하지만 당선 자체가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수는 있고, 또 임기 이후에 오히려 뭔가를 보여줄 수 있기도 하다.
여하튼... 과연 그가 또 다른 운명으로 여기고서 받아들일지, 그래서 결국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지켜 볼 일이다.

2011년 8월 16일 화요일

"백청강, 한국 국적 취득 질문에 당황..고개 숙여 (파이낸셜뉴스)"

'위대한 탄생' 우승자인 백청강이 한국 국적 취득에 대한 질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16일 방송된 YTN '뉴스앤이슈-이슈앤피플'에 이대권, 손진영과 함께 출연한 백청강은 "한국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한국 국적 취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아직 그런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생각해 볼 문제"라고 간결하게 답변했으나 이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나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질문이 어렵다"라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

페이스북엔 왠지 좀 무거운 얘기, 특히 견해가 갈릴 수 있는 민감한 주제에 대한 얘긴 꺼내기가 힘들다. 아애 논쟁을 목적으로 삼은 그룹 성원들끼리의 대화가 아닌 이상... 사실 나도 부정적 얘기, 비판적 얘기가 지속되면 내가 그 얘기에 공감, 동조하더라도 왠지 좀 거리감을 두고 싶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설명, 이해할 수 있을까? 페북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성격일텐데... 하여 이 얘기는 여기에서 풀기로 한다. 더군다나 페북에서 오늘 기성용의 그 철없는 행동에 대해서 짧은 소감을 남긴 터라 비슷한 얘길 거기에서 또 하고 싶지 않은 탓이다.
YTN 앵커라면 배울 만큼 배우고 또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엘리트라면 엘리트일 것이다. 그런 인간이 생각하는 꼬락서니가 딱 저 정도다. 다음 기사에 달린 댓글도 또한 가관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의 향연이다. 그래 가지고서 무슨 염치가 있어서 일본을 욕할까...

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몇 가지

야스퍼스를 좀 더 읽고 공부할 필요성을 '급' 느낀다.
- 근대성에 대한 논의 (베버, 아이젠슈타트,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복수 근대성 논의와 연결시켜서)
- 종교다원주의 (칼 바르트 논쟁 등과 연결시켜서)

축의 시대의 핵심은 '내면의 발견'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야스퍼스 얘기인지, 암스트롱 얘기인지 구분해 봐야 할 듯)
종교와 철학이 꽃을 피운 기원전 900년~기원전 200년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석가모니가 등장,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태어났다. 교류가 없던 네 민족이 어떻게 사유의 혁명을 일으켰는지를 탐구하는 것. 인류는 아직도 축의 시대 통찰을 넘지 못했다는 건 (야스퍼스는 모르겠고) 암스트롱의 주장이라고.

근대성 이야기 하면서 그걸 제2의 축의 시대라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Schluchter이야기라고 하는데 출전을 찾을 수 없다.) 근대성을 핵심을 '초월의 내재화'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1차 축의 시대가 인간 내면의 발견했고 초월적 설명을 지향했다면, 2차 축의 시대 (근대성은) 그 초월을 내재화 (인간 내면의 재발견인가?)시켜서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이해한다.

그런 매우 개인주의적, 심리적, 종교적, 문화적 근대성 이해는 (베버 냄새가 강하게 나는...)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 중 아주 특정적인 부분한 이야기일 것이다.
여하튼 복수의 근대성, 아시아적 근대성, 유교적 근대성을 이야기 할 때 근대성을 그렇게 정의하고 접근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러면서 시민계급, 자본주의 맹아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근대성 논의를 너무 높은 차원에서 접근하면.. 심지어 야스퍼스 전통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공통적 조건을 가진 이상...)... 너무 높은 차원에서 접근하면 시기적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하고...
다시 표현하자면, 근대성에선 모든 문화, 문명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찾으러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봤을 때 설명이 더 그럴듯해지는 지에 대해선 의문이라는 것!
아.. 복잡하다.

너무 종교 중심적 설명아닌가?

2011년 8월 13일 토요일

"전문가의 실력 = 전문지식 X 커뮤니케이션 능력" (안철수)

2011년 8월 12일 금요일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지역을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가 강력한 국가, 국가 중심주의다. 발전국가가 그 대표 브랜드고.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 중심주의의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국가가 도대체 뭐냐는 것... 근대국가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도대체 근대국가 이전의 국가와 무엇이 다른지... 좀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을까....

2011년 8월 11일 목요일

뭐지? 이 미묘한 기분은? 상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조절의 문제?
Buber 할아버지는 관계를 'Ich 와 Du' 'Ich와 Es (Er, Sie)' 관계로 구분을 하는데...
웬 걸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단계로 봐야 할 것이다. 한 쪽 끝에 Ich-Du관계가, 다른 쪽 끝에 Ich-Es관계가 있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되는 관계는 그 위 어디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어려움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다. 직장 동료 혹은 상사와의 관계는 학교 선후배, 교회선후배 관계와 다르다. 많이...
너무 많은 걸 고려하면, 너무 적게 고려해도... 좋지 않다.
처세에 능한 것도 무능한 것도 모두 좋지 않다.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기... 어렵다...

2011년 8월 9일 화요일

잠못드는 밤. 새벽 1시 반. 요즘 이런 현상이 자주 .... 몸은 피곤한대도 잠은 쉽게 오지 않는... 짜증이 부쩍 늘었는데 - 그 대상은 뭐 뻔하다. 사무실 '선배들'이나 오고가며 부딪히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그럴 순 없으니 대개 아내나 가끔씩 운전할 때 내 눈에 거슬리는 차량들(과 그 운전자들)이 된다 - 모두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늘 나우웬의 책을 한 권 주문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선 Martin Buber의 Ich und Du를 읽었고... 해결책을 그런 방향에서 찾아 오려 한다.
아... 이제 또 뭘 하지... 요샌 밤이면 눈이 먼저 피곤해져서 책을 보기도 힘들 때가 잦은데 오늘도...

2011년 8월 8일 월요일

"성서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유아적 수준에서 읽어서는 안된다" (박영식, 1970? ~ ^^)
"인문학자는 필연적으로 역사학자 일 수밖에 없다" (어윈 파놉스키 Erwin Panopsky, 1892~196, 예술비평가)
지난 포스팅 추신에서 썼던 얘기를 이어가 보면...

'균형잡기'의 핵심 작업은 무게 추가 기운 쪽에 대한 비판과 반대 쪽에 대한 응원, 힘 실어주기다. 하지만 이놈의 현대사회는 너무도 복잡해서 고려해야할 무게 추의 종류 자체가 너무도 너무도 다양하다. 이 복잡성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사안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사안 자체는 물론이고 변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시대적, 지역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말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일관되게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 아니 그럴 수록 일관성을 유지하긴 해야 하는데 그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원칙은 지독하게도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높은 고도에서 유지되는 추상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낮은 고도에서 하는 얘기들에서 모순을 찾아내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공공성과 사적 자유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 공공성이 너무 약하다는 평가를 내리면, 사적 자유를 억제하더라도 공공성을 진흥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왼쪽 지향 시민운동이나 기타 정치적으로 왼쪽에 있는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특히 복지정책과 관련해서. 반면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한국에선 국가의 개입 정도가 너무 심하여 개인의 권리, 자유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공권력 남용 사례를 언급하면서. 이런 주장은 정치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부류들도 자주 제기한다.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면서. 공공영역을 상징하는 대표적 조직인 국가에 대해서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공존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사안에 따라 다른 평가을 내리고 다른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결론만 놓고 보면 때론 신자유주의자처럼 보이고 때론 국가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처럼...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상대가 대적하는 세력의 내부를 흐트러트리려고 의도적으로 다양성이란 외피를 입을 때. 일제 시대 문화정치, 80년대 3S 정책, 조선일보의 문화면 등이 그런 사례에 꼽힌다. 그런 경우 다양성, 유연성을 포기하는 게 전략적으로 긴요할 수있다. 그런 조건에서 '투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투사'란 이름을 얻게 되면 나중에 시국, 정국이 바뀌었을 때 잃게 되는 것도 많다. 보수적, 반동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도 '투사'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을 고수한다던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서 원칙, 입장을 바꾸었을 때 '변절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앞 사례로 백기완이, 뒷 사례로는 박노해가 떠오른다. 균형잡기는 바로 다양성, 균형잡기, 정당화의 유혹을 극복하고 원칙을 유지할 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적극적으로 입장을 수정할 지.. 그 두 전략 사이에서 균형잡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최상위의 균형잡기라고 볼 수 있겠다 (메타 균형잡기).
인생은 줄 타기고 줄 잡기다. 그런 줄타기가 시대와 잘 맞으면 영웅, 투사가 태어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은 선각자가 만들어지고, 마찬가지로 변절자, 보수반동도 만들어진다. 그러니 평가에 연연하지 말 일이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현재의 평가를 너무 신뢰하지도 말 일이며.

2011년 8월 7일 일요일


3대 국제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8월 5일 오후8시(미국 현지시간)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추었다(고 한다). 신용등급 강등이 향후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한 얘기들이 많은 모양이다. 몇 가지 정리해 보면...
- 미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진 것은 앞으로 미국이 돈을 빌릴 때 내는 이자(율?)이 높아진다는 뜻
- 미국이 매년 이자를 천억달러, 100조원넘게까지 더 물어야 한다는 분석이 있음
- 미국 국채 가치는 20~30% 낮아질 것으로 분석하고 있음
- 1조1600억달러에 이르는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 그 미국 국채가치도 2300억~3400억달러 정도 떨어짐 (중국인 1인당 180~260달러의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계산)
- 달러의 기축 통화 지위가 무너진다면 2차대전 이후 이어진 미국의 최강대국의 지위도 흔들릴 수 있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미국이 더 이상 예전의 그 미국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번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린 문명사적 전환기를 겪고 있는 지
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돌아가면서...)-미국으로 이어지면서 15세기 이후 이어져 온 서양 문명의 세계 지배가 끝나고 있는 듯한... 새로운 강자로 대개 중국을 얘기하는데... 일본, 한국까지 껴서 세트로 동아시아를 지목하기도 하지만... 관전 포인트는 과연 중국 혹은 동아시아가 새로운 문명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단지 주도권, 특히 경제적 주도권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가는 정도의 변화냐, 아니면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느냐는 변화냐는 점이다. 근본적인 변
화라면 예컨대 자본주의의 몰락 같은 것 말이다. 이미 자본주의화된 중국이 유일 강대국이 된다고 해도 세계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이익을 내고 있는 기업들, 투자가들에게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분주하게 대비하고 있을 지도...
문명의 전환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소설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나도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루만은 세계사회 같은 얘기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얘긴 더 이상 놀랄 거리도 못되니... 이 시점에서 루만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뭔가를 해 보려는 사람들로서는 답답한 일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 한편으로 근대 프로젝트가 여전히 진행중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의의가 없진 않겠지만....

p.s) 여하튼, 난 루만이건 푸코건 칸트건 헤겔이건... 그들을 무슨 성인, 성자 모시든 하는 '인간들' 경멸하는 편이다. 가끔은 '분노'까지 느끼곤 한다. 아, 그건 이쪽으로 와도 마찬가지다. 다산 정약용이건 퇴계 이황이건 노무현이건 자기 조상님이건... 멘토, 롤 모델 정도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분명히 해두는 데... 그러니까 나는 대개 중간자적 입장 혹은 전략을 취한다. 학문에 대해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균형을 잡는 일에 자질, 소질, 달란트, 탤런트가 있는 것 같다. 나쁘게 얘기하면 박쥐, 회색분자, 벨도 없는 놈, 비겁하고 남 눈치만 보는 녀석이 되겠지만...
학자 'L'에 대한 내 태도를 예로 들어서 살펴보면 이렇다. 한국에서 그 양반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를 열심히 소개해 볼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그 학자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서 소개, 번역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어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부에서 광신적인 태도로 L을 대하는 모습이 나온다면 난 오히려 그들을 진정시키는 일을 내 역할로 생각할 것이다. 내가 관련된 조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조직 내부에선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테지만, 근거없는 외부 비난 앞에서 조직을 옹호할 것이고... 사람, 조직, 사상, 견해 등에 대한 '평가'가 문제가 되는한 난 늘 균형적으로 보자는 입장이다. 비슷한 얘기지만... 노무현의 경우. 지나치게 저평가 되거나 무시 당하던 시절에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만, 이미 대단한 지지그룹들이 이제 큰 물결을 이루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저건 아닌데 하며... 중간자, 균형자의 입장의 뿌리엔 '다수의 힘'에 대한 근원적 거부감, 저항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 생각의 진동수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 운동이다. 그 거부감의 대상은 독재권력이 될 수도 있고, 학생운동이 될 수도 있다. 그럴 일이 있을 리 없지만 혹시 나중에 내가 해석의 대상이 되어 '정광진論' 같은 게 나온다면 바로 이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의 틀을 갖게 되었을까? 뭐, 틀릴 확률이 적은 설명 공식은 '유전적인 요인' + '환경적인 요인' = '나' 일 것이다.
미국 신용등급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군. 바로 이게 혼자만 보는 일기도 아닌, 여럿이서 보게 되는 '페이스북'도 아닌, 찾는 이 많지 않은 '내 블로그'에서 글쓰는 맛 아니겠는가? Danke dir!

2011년 8월 6일 토요일

이게 내가 일하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뭔가 열심히 하고, 뭔가 아는 것 같긴 한대... 문장, 문서 형태로 써 놓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지금 쓰고 있는 보고서 얘기다.
-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열심히 읽고 고민한다.
- 이때까지라면 마감시간을 넘기지 않고 써 낼 수 있다고 믿는 그 시간까지 그 짓을 한다.
- 물론 그 마감시간을 넘긴다.
- 마감시간을 넘기니 조급해지고 막상 써 놓은 것은 마음에 들지 않고...
- 그 동안 많은 고민을 한 게 문서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 같고...
- 도무지 뭘 했나 싶은 거지
대충해서 그런 결과를 얻었으면 덜 억울할 텐데...
결론은...
(1 ) 아직 멀었거나... (내공)
(2)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더 쉽게 표현하는 보고서나 논문의 새로운 형식을 고민해 봐야겠다는...

2011년 8월 4일 목요일

점심먹고 산책을 하려다 그냥 들어와 앉는다. 덥기도 하고, 같이 나설 사람도 마땅찮은 탓이다 (이곳엔 산책문화가 없다ㅠㅠ 괜찮은 산책 코스가 있는데도...). 모니터 앞에 앉아 그냥 하릴없이 여기 저기 들쑤신다. 조금 전에 봤던 페이스북 또 보고, 방금 들어갔던 미디어 다음 또 들어가고... '공식' 점심인 1시까진 그렇게 해도 좀 덜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집중을 할 수 없어 인터넷 방황을 하면... 짜증나기 시작한다. 이중 짜증... 집중 안됨과 시간 허비에 대한...
여러 사람이 들여다보는 페이스북엔 이런 얘길 적기가 뭣하다. 하여 인적 드문 이곳에 그냥 토로하는 것.

다양성 관리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영향을 극대화 하자! 다양성 관리가 그런 걸 지향할 터이다. 다양성 관리를 하고 그런 개입이 긍정적 영향을 가져오기 위해선 많은 시간, 비용,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 SERI 보고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 다양성 관리의 목적이 차이를 관리해서 새로운 통일성, '화학적 융합' 만들어 내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융합과 다양성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이기 때문이다.
통일성, 융합을 얘기하는 이들은 대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의 '정상화'가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거나 아니면 은연 중에 갖고 있다. 예를 들어서 장애인은... 정상이 아니어서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들... 그러면 장애인을 정상화하거나 관리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보다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 액션 플랜으로 연결되기 쉽다. 우생학, 인종청소가 그렇고... 다름을 그 자체로 인정하자는 것. 정상,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상태가 아니고 그저 다를 뿐이라고. 차이의 인정, 그 영역이 넓어질 수록 사회가 뒤죽박죽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각종 근본주의자들이다. 종교근본주의자 (이슬람이건 기독교건),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우파건 좌파건)...

2011년 7월 31일 일요일

이것고 맞고 저것도 맞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늘도 진실은 그 어디쯤에서
이러 저리 방황하고 있을테요

그러니 어느 길목 한켠에 자리를 잡고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 것이요

진실을 만나기 어렵다는 진실!
그게 진실인데 사람들은 그 진실에 그닥 감동하는 눈치가 아니요

우연히 한 번 만난 진실을 가지고
- 얘기했듯이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그 녀석을 만날 수 있는 법이거든 -
좌판을 펼치거나 상점을 여는 장사치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진실을 흥정하는 사람들

알면서도 속고 모르고서도 속는
경제학자들의 경기예측 같은 그런 진실

진실을 만나게되는 그 순간
그 녀석은 냉큼 다른 길로 도망가 버리거든

그렇다고 진실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죄 부질 없는 일이어서
아애 입을 닫아야 할까
아님, 어설프지만 그래도 얘기해 봐야 할까

어짜피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살 수 없다면
시간 공간을 좌우축으로 삼는 좌표 위 어느 한 지점에 있는 거라면
그 순간의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옳을 지도...
하지만 좌표가 이동하는 순간!
그 진실이 몽땅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은 채 말이지

무척이나 혁신적인, 심지어 혁명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진실도
타이밍을 놓치고 뭉기적거리는 순간!
더할 나위 없는 보수반동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리거든

모든 것이 말하는대로 창조되는 시대에서
그러니끼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도는
꼬리가 꼬리를 물고 또 물리는 세상에서
진실을 얘기할 때
그건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단면에 대한 것이거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진실에 대한 진술은 아이러니, 역설, 모순, 풍자, 비유, 염세주의가 될 수 밖에 없어
산문이 아닌 시로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뭐야. 벌써 7월의 마지막 날인거야? 내 참... 우습지도 않군ㅠ 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이 버벅대는 도서관 네트워크, 꾸물대며 기분나쁘게 쫘악 가라않은 저 날씨... 허나 이 모든 게 왠치 친숙하오. 너무 친숙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요. 아~ 그렇게... 나의 2011년 7월은 가고 있는 게요.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요즘처럼 온라인 접속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리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애써 피하려고 했으니까. 늘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낮시간에 접속된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 '업무'상... 그러다보니 아닌게 아니라 여기 저기 더 들쑤시고 다니게 된다. 대표적으로 페이스북... 친구들이 많지 않아 업데이트되는 내용도 그리 많지 않은데도... 흠. 그다지 좋은 현상이라고 보긴 힘든데... 이러다 말까? 줄어들까?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서울에 물난리가 났다. 집과 일터 근처는 평온해서 '남의 일'인가 보다 했는데, 평소 차로 이삼십분 거리이던 출근길이 세시간 넘게 걸렸다던 아내 얘길 듣는 순간! 바로 '내 일'로 해석되기 시작... 어쩔 수 없다. 주어지는 정보와 뉴스를 모두 '내 일'인양 걱정하다간 내 뇌는 처리 용량을 넘어선 정보량 때문에 이내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리라. 그런 점에서 볼 때 기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기억이 아닌 망각에 있다는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기억을 통해서 다른 것들을 망각하고 이를 통해 새로 기억할 용량을 확보한다!)
여하튼... 날씨 얘긴 그냥 말을 시작하기 위해서 꺼낸 소재일 따름이고...

요 며칠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조금' 우울하다.
(1) 먼 곳에 남겨두고 온 일 관련해서...
(2) 한 때 뭔가 해 보려고 좀 관련을 맺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멀어진 이들의 근황과 활동을 전해들으면서 느끼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반면, 생각의 다른 한 켠에선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오른다. 직업선택에 관한 '거창고 십계명'이라는 것인데 그 중 제2계는... "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세상 일을 "내가 원하는 것/일"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일"로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런 건 어떤가.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부딪쳐 보니 막상 그 곳에선 나를 그다지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다던지. 아니면 별로 하기 싫은 일인데 나를 필요로 하니 신이 나서 그 일을 하게 된다던지... 물론 거창고 얘기는 어떤 점을 더 중시할 것인가, 그 얘기를 하는 것일 테다.
내가 원하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곳에서 일할 마음을 먹으라는... 막상 우선순위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두면 결정을 내리기 훨씬 쉬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고서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바엔 아애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기웃거릴 필요도 없다.
어쩌면 난 아직도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겹치는 그런 분야가 있긴 한대 유감스럽게도 직업전망과는 별무상관이다. 흠... 여하튼 누가 뭐래도 난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 날 필요로 하는 곳 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그런 쪽을 찾아 줄기차게 찾아 볼 테다. 어쩌면 평생 그럴 지도 모르지... 뭐, 그것 역시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잖은가? Oder?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변화를 통한 지속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어느 쪽이냐... 관점, 시점에 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너무 열어놓는 것 역시 별로다. 이런 주장은 어떤가. 변화를 통한 지속. 변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변하지 않는다! 좀 더 와 닿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변화는 대개 주변부나 접경지대에서 일어나고 중심부는 그런 주변부에서의 변화를 통해서 면역력, 내성을 키워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윤리경영, 문화경영, 감성경영을 내세우는 대기업들! 대표적인 경우다. 외피를 바꿔보고, '심지어' 일부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겠다는 전략 아닌가.
하지만 변화를 통한 지속이 늘 이렇게 노골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변화처럼 보이는 현상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목적달성에 기여하는지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맑시스트라면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
물론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 현상은 그저 반작용으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이다. 노르웨이 참사의 주인공, 우익세력이나 여타 근본주의 세력의 부흥이 '자본주의 질서 재생산'을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세계화라는 변화 속에서 세계를 잃어버린 이들의 저항, 반작용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 갈등을 얼마나 '잘' 흡수하는가가 '핵심부'의 지속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슈인 것이다. 정리하자.
변화엔 두 종류가 있다.
(1) 핵심부의 재생산을 통한 지속에 기여하는 주변부의 변화
(2) 기존 질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나는 현상 (일탈에 가까운...)
핵심부는 (1)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조장하기도 한다. (2)에 대해선 이중적 태도를 가진다. 때로는 재생산을 위해서 (2)를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를 이용해 먹는 정치집단들. 때론 (2)를 처리가능한 방식으로 거르거나 변형시켜서 재생산을 위한 조건으로 삼는다 (도덕적 논쟁을 다루는 방식인 '윤리화'가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 글을 보면서 놀랄 때가 가끔씩 있다. 내가 고민하던 내용들을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해 내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런 경우를 발견했는데, 예를 들어 이런 문장: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분명하다. 체제의 변화가 개인을 소외시켰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브레이비크의 저항은 보수주의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세계화(globalization)가 만들어내는 '세계 없음'의 상황에 대한 극우파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를 없애버리는 세계화는 아무런 이념적 지향이나 적대도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화는 좌파 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하나의 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브레이비크는 '노동당'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일부에 테러를 가함으로써, 무의미해진 좌우파의 대립구도를 폭력적으로 복권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사명'은 이렇게 적을 명시하고 다시 적대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던 셈이다" (노르웨이 테러범 단상)


노르웨이에서 참사를 일으킨 테러범 베링 브레이비크에 대한 얘기다. "세계화가 만들어 내는 '세계 없음'". 캬...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인데 그걸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해 낸다. 음... 아직 멀었어...

'헤어드레서' (도리스 되리, 2010)


'파니 핑크' (1994)(원제 Keiner liebt mich)라는 인상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Doris Dörrie 감독의 신작이다. 원제는 'Die Friseuse'. 이동진 '기자'의 호의적인 평, 그리고 '독일영화'라는 이유 때문에 주말관람용으로 선택되었다. 허나 내가 영화 정보를 얻기 위해 애용하는 IMDb 점수는 썩 좋진 않았다. 6.5/10. 흠. 일단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좀 낮추고서 ins Kino gehen.
결론적으로... 영화 완성도만 놓고 보고 딱 IMDb 점수 정도 되는 영화다. 크게 나쁘지 않은 영화...
작게 나쁜 점들을 지적하자면... 지나치게 전면에 드러난 주제의식 (사회문제 수업용으로 쓰기 좋은...),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 전개 (갑작스런 어머니와 딸의 화해, 김일영씨의 어정쩡한 역할 )... 한 마디로, TV 드라마 같은 '필'을 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하지만 특별한 '관전 포인트'들 찾아내는 재미도 있었다.
- 서울의 몰취향 아파트촌을 연상시키는 동베를린 풍경 (아파트는 '파니 핑크'에서도 중요한 공간적 장치였다.)
- 독일이 겪는 사회 문제들... (여성문제, 구동독 주민들의 상황, 실업, 이주민들 문제 등등)
- 베를린 지역 방언들... (ex. gut -> 윳, keine -> 케이네, was -> 밭, 밧?)
- 한 때 독일 M-tv 진행을 맡기도 했던 김일영씨의 최근 모습

독일어 원제가 여성 미용사라는 뜻으로 흔히 쓰는 Friseurin이 아닌 Friseuse다. 주인공이 그런 내용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왔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구글씨의 도움을 받아서 나중에 확인해 보니... 구동독 시절 여성 미용사를 Friseuse로 불렀다고... (사전적 의미로는 동의어라고 함). 아마 영화 속에서도 그런 설명이었으리라...

ps) 이 짧은 영화평은 facebook에 먼저 썼고 나중에 이 곳으로 옮겨 왔다. 아마 첫 사례일 듯한데... (지금까진 그 반대방향). blog-facebook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려는 신호일까? 아마 최근 facebook 친구 범위가 확대된 탓일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지켜 볼 일이다.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共振

강변 테크노 마트 진동은 12층 피트니스센터에서 진행된 '태보 운동' 때문이었다고 결론내려진 것 같다. 태보 운동의 수직 진동수 2.7Hz (1초에 2.7번 진동)가 우연히 건물 전체의 고유 수직진동수와 맞아떨어져 '공진 현상'(共振, resonance)을 일으켰다는 것.

모든 건물에 고유한 진동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진동수만 맞다면 사소한 움짐임만으로도 예측하기 힘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영화 소재로도 사용될만한 흥미로운 사실 아닌가? 테러범들(??)이 정부요인들이(??) 묵고 있는 고층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태보운동'을 이용한다!!!

각설하고... 건물 뿐 아니라 사람들도 누구나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물리적 진동이 아닌 사고.. 생각, 사고, 성찰의 진동수가 형성되면 새로운 정보가 주어져도 대개 그 진동 범위 내에서 이해한다. 내가 발산하는 진동수와 대화 상대의 진동수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큰 소리로 여러 사람이 떠들어도 잔향이 크지 않다. 반면에 진동수가 맞는 사람끼리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반향이 생긴다. 어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을 때 내 속에 엄청난 반향이 일어난다면, 그건 그 양반과 나의 사고 진동수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롤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내가 말하는 입장일 경우 청자들의 반향을 읽어 보면 드물게 큰 반향이 관찰되는 경우가 있다. 진동수가 맞은 것이다. 예전엔 "코드가 맞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정적인 느낌을 주는 '코드'보단 '진동수'가 더 어울리는 개념인 것 같다.

헤테로토피아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사물의 질서, The Order of Things, 1973』
우리가 수많은 유사한 사물들과 상이한 사물들을 분류하고자 할 때 어떤 사유 방식에 따라서 사물들을 절시화 하는지를 흥미롭게 묘사.
사유를 지배하는 질서의 법칙을 호모토피아(Homotopia)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대립개념으로 서술.
호모토피아는 상이성을 배제하고 풍부한 통일성만을 확고한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정신의 상태를 의미, 세계의 통일된 구성체를 암시하는 감추어진 소수의 단서만을 인식하려는 성향.
헤테로토피아는 어의적인 의미로 사물들이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중첩되거나 위치하고 있어 이들 모두에게서 공통되는 위치를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물의 상태’, “혼란 속의 질서”[서구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카오스 이론, 퍼지식 사고 등 새로운 학문적 접근은 우리가 무질서라고 생각하는 현상 속에도 질서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 아리스토텔레스의 2진 논리인 ‘이것 또는 이것이 아님(A or not A)’에 기초한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탈피하고, ‘이것과 이것이 아님(A and not A)'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고의 인식을 전제]라고 사유체계를 확인가능.
하나의 고착된 사유영역에서 간과하게 되는 또 다른 사유 영역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유 체계의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데 기여"
[출처] 호모토피아, 헤테로토피아|작성자 숨


푸코는 내게 해묵은 숙제 같은 인물이다. 좀 더 진득하게 붙잡고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늘 찔끔찔금 들춰보기만 했다. 투사, 계몽가, 선구자처럼 '핫'한 하버마스보다는 '쿨'한 루만이 마음에 들긴하나 그 양반은 너무 깔끔해. 수학자 혹은 물리학자 같은 깔끔함.... 칠판 가득 각양각종 수식을 써가면서 "봤지? 니들이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 번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해볼게. [외계어!] 그리하여... 결론은...." 이런 얘길 하는 듯한... 세상을 설명가능한 방식으로 축소하려는... 푸코는 일단 지저분한다. 루만이 보여주는 '깔끔함'이 없다. 자기 생각을 일관된 이론으로 만들 생각도 없었고, 게다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사람을 끌리게 만드는 철학자다운 풍모랄까 그런 게 있다. 게다가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고...
'헤테로토피아' 이야기도 난 H. Willke 저서 이름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사실 푸코가 써서 이미 유명해진 개념이더구만. 여하튼... "역설적인 것들의 공존하는 공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텐데... 요즘 상황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표현인듯.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표현은 이미 시간의 선후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거림칙한 표현이 있고... "근대의 다양성" (varieties of modernity)에게도 비슷한 혐의를 씌울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우리가 관찰하는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현상에서 뿌리나 시작을 찾고 사건의 선후관계를 찾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접근법이다. 근대주의자들이 그리도 붙들고 싶어하는.... "근대성의 기원은 유럽" 같은 주장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젠 그런 것 따지는 행위 자체가 아주 번지 수를 잘못찾은 고리타분한 접근이라는...
어제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독교 근본주의자에다 극우적 성향을 가진 32세 청년이 저지른 학살이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며 갈등, 분쟁 없기로 유명한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어쩌면 그런 게 헤테로토피의 한 모습일 지도... (물론 유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9.11 테러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와 뉴욕 쌍둥이 빌딩과의 조우. 아니 미국은 이미 최첨단 자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가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선구자 같은 존재였다).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A or not A), 즉 평화, 화해, 공존, 관용 아니면 갈등, 테러, 전쟁, 투쟁... 이기 때문에 "A 와 not A의 공존"이 위기거나 예외적 상황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이제 "A 와 not A의 공존"이 정상적 질서로 받아들여야 할 모양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례로 유럽인들이 수용하는 한국제 팝음악 (한류?) 등을 들 수 있겠다.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말을 해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가 있는데...
때론 그 타이밍이 기묘하게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 한 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상황...
그런 위기 상황을 원천적으로 피하는 방식 중 하나가 분위기와 상관없이 일관성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 시종일관 말이 많거나, 말이 없거나... 눈치 없단 소리도 한 두번이지 이내 '에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절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공존.
아니.. 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선 '공존'이 아닌 '공생'에 가깝다.
그러니 시점, 관점, 강조점에 따라 다른 진술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급격한 변화가 관찰되고 변화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급격한 변화를 얘기하는 게 '오버'나 호들갑떠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변화를 강조하는 게 잘 변하지 않는 질서의 지속, 재생산을 위한 전략적 장치인 것 같기도 하고...

'다름'과 '같거나 비슷함'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시점, 관점, 강조점의 차이.
한국 문화와 독일 문화!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매우 다르고.
국가 단위에서 작동하는 정치나 대중매체는 '다름'을 강조하거나 심지어 없던 차이도 만들어 내려고 안달하는 것 같다. 나라마다 경쟁적으로 '국가 브랜드' 어쩌구 하는 사업들을 하고 있고... 한국의 경우 '한류' 때문에 더 그런 방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결국 돈 좀 더 벌자는 얘기아닌가? 국가 브랜드, 한류 같은 이야기들? 문!화!산!업!
언제 어디서나 '차이' 나 '특징'은 구분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지옥'이 없으면 '천국'은 있을 수 없다. '여자' 없는 '남자'가 있을 수 없고... 비정상 없는 정상은 그 의미가 성립불가하다.
그러니 중요한 질문은 '차이가 있다? 없다?' '비슷하다? 다르다?'가 아니라 '어떤 조건, 어떤 시점에서 어떤 차이가 왜 만들어지는가?'여야 한다.
'한국 문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어떤 특성이 한국문화라고 지칭되면 다른 문화와 구분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정보사회 담론이 지식사회, 위험사회, 네트워크사회, 탈현대사회 같은 담론에 자리를 내 주나 싶었더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같은 새로운 매체 덕에 다시 생명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정보사회'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얼마 전엔 스마트폰이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을 것처럼 떠들더니, 이제 그 바톤을 '클라우드 컴퓨팅'이 받아 든 형국이다.
물론 세상은 늘 변한다. 각종 정보통신기기나 네트워크가 거기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기도 한다. 아니... 때론 퇴행적으로 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정보통신기기가 그런 역변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
인터넷이란 매체 등장이 시각적 정보의 유통을 증가시키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이 '읽게' 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 문자문화는 영상문화로 그리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것.
세상이 변한다고 너무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호들갑을 떨어야 겨우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게 대중매체의 특성이고, 정보사회의 중요한 한 단면이다.
그러면 정보사회란 얘기인가?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한국어의 공대법, 존대법... 어렵다. 어떤 표현이 최적인지 늘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예를 들어, 비슷한 연배끼리 '자제분' 운운하는 건 너무 '닭살스럽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이 내게 '자제분' 이란 표현을 쓰면서 질문을 했음에도 내가 그 상대의 가족 상황을 물으면서 '아이들'이란 표현을 썼다면... '찝찝함'이 남는다. 내 '지조'를 지키긴 했지만, 내가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상대로선 ' 예의도 모르는 저런 인간이 있느냐'고 속으로 욕했을 지도 모를 일이기에...
이런 고민을 줄이는 손쉬운 방법이 대화 상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존대하기다. 특히, 서비스업이나 안내를 맡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식인데... 예를 들어 "여긴 3층이시거든요." "5천원 이세요" 등등. 처음에 이런 적절하지 않은 존대법이 몹시도 거슬렸으나, 존대법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들이 생겨나면서 어쩌면 그런 '지나친 존대법'은 매우 합리적이고도 탁월한 위기 해결책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정보가 오고 가는 대화에서 발신, 수신 사이의 시간적 거리(pause)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경우 그 사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의사소통한다. 다시 말해 그 거리를 인지하는 경우 - 대부분 평소보다 더 길게... - 그 상황은 재빠르게 '낯선 것', '특별한 해석이 필요한 상황', '위기'로 해석된다. 그 거리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을 텐데 그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상황, 대화상대자, 문화권 등 여러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경험한 상황의 경우 약 1초 정도의 지연이 있었다. 일상적으로 답변이 나오는 순간에서 약 1초 후에 답변이 나왔다는 말씀. 아니나 다를까 답변은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이렇게 지연은 대개 부정적인 답신과 연결되는 경험이 쌓이면 그런 상황을 '위기'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여하튼... '위기'로 해석하기 쉬운 답신 지연 상황을 맞닥뜨려도 최대한 '쿨'하게 넘길 일이다. '위기'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표내는 순간! 없던 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벗뜨... 그런 '침묵'의 순간, 답신 지연의 순간을 두려워해서 아애 그런 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한다. 대화가 끊기는 침묵. 고요의 순간을 '위기'로 느끼는 대화 '문화'. 특히, 현대인들이 그러지 않을까?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 심지어 혼자 있는 그 순간에도... 뭔가를 듣거나 보거나...
특히 스마트폰이 널리 사용된 이후로 길을 걸으면서도 손에 든 기계를 보는 사람들이 자주 관찰된다. 보기 좋지 않는데스마트폰을 구입하게 되면 - 아이폰5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 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침묵, 고요함, 정보 발신과 수신 사이의 그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위기'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사실 침묵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어짜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너무도, 너무도 제한적이니까...

ps) 최근 거주하고 있는 나라를 벗어나 논문발표를 한 친구 소식을 들었는데 그 친구 연구 주제를 새삼 떠 올리면 든 생각을 팀 워크샵(이라고 부르지만 엠티 성격을 갖는...) 출발하기 전 남는 어중강한 시간을 이용해 적어 둔다.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過猶不及 은 진리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못쓰는 법! 요새 '비'가 그렇다. 지난 겨울엔 '눈'이 그렇더니...
비, 눈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그렇다고 비도 눈도 적당하고 햇볕도 적당한 그런 곳에 살면 늘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
노우! 네버!
'늘 좋은 날씨'는 바깥에서 봤을 때 내리는 평가다. 그 속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기준이 생기는 것.
천국에 대한 묘사는 바로 천국 바깥에서만 그릴 수 있는 그런 모습이듯....
그러니... 좋은 날씨를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요새 날씨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다른 한편, 너무 지나칠까 勞心焦思 하는 것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중간만 하자". "튀지 말자", "남하는 만큼만 하자"...)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정하는 순간!! "제명이 됐어요!!"가 아니라....^^ 지루해지고, 고리타분해지고, 재미없어지고, 어른스러워진다.
지니침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中庸이 반드시 좋을 수도 없다.
그러니... 지혜가 필요한 것. '센스'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치를 보란 얘기가 아니라... 지혜롭게 잘 판단하라는 말이다. 세상에 '항상 이래야 한다... '는 건 없다.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보호는 지배의 다른 이름이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신은 망했다.

- 이갑수, <신은 망했다>


클릭 한 번에 만난 詩이고, 한 번 더 클릭해서 이 시가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의 시에 나오는 구절 'God made the country, and man made the town'에 한 줄 더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갑수 시인의 재기발랄함이 놀랍고, 이런 정보를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어서 한 번 더 '새삼' 놀란다.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결국 문제는 근대성이다. 사회 변화, 시대의 흐름을 높은 고도 심지어 구름 위에서 내려다 보려면 '근대성' 이란 단어를 피하기 힘들다 (물론 '근대' '근대성' '모더니티' 같은 개념을 쓰지 않고서 역사학, 사회이론 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는 얘기다). 초기 사회학자들이 '근대성' 혹은 '근대'의 등장을 설명하려 했다면, 20세기말부터 사회학자들은 이 근대성/근대의 변환을 설명하고 있다. 전근대-근대-후기-(혹은 탈-) 근대!! 이런 시대 구분, 사회 성격 구분이 너무 '도식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폐기'하자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건 '탈근대'적 현상이라고 가볍게 이해해주시면 된다.
근대성을 추상화해서 역사적으로 유럽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multiple modernities 주장은 비서구인 관점에서 볼 때 위로는 될지언정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냥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정해주자. 물론 그 과정 자체는 이미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유럽이 진공상태 혹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었기에... 그건 굳이 걔네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우연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우연... 그러니 너무 주눅 들 필요도 없고, 자존심에 상처받은 것 표내면서 '오버 리액션'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그 근대는 '속성상' 특수적이기 보단 일반적, 배제적이기 보단 포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양한 변이, 변형은 근대에 원래부터 프로그램되어있었던 것이다. 서구가 근대의 오리지날이고 비서구는 서구를 좇아가고 (근대화) 거기에 성공하는 나라들은 다 비슷해진다는 수렴론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났다. 서구식 근대가 있었던 것이고, 서구란 것도 그 내부를 살펴보니 다양한 변이들이 발견되고 있고, 비서구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다양한 근대 버전이 관찰되는 것이고... 그러니 근대의 다양성, 변이는 기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지만 그래도 '근대'라는 상위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지, 그게 핵심적이 논쟁점이다. 난 그런 게 있다고 보는 것이고... 그런 '근대'가 있다고 상정하는 입장도 또 나뉜다. 그 '근대'가 생명력을 다해서 '탈근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입장과 '근대'의 핵심적 특징은 지속으로 관찰되고 있다는 입장으로.
여기에서 단일한 근대, 근대의 지역적 변이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근대'가 객관적 실체로 물건처럼 관찰되는 대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근대는 구성물이다. 모든 사회적인 것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근대성을 유적 발굴하듯이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 한국도 근대라는 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 그렇다고 온전히 우연도 아니지만... -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성이라는 OS로 세계가 포맷되었고, 이제 그 이후론 좋건 싫건 간에 일단 근대성이라는 OS로 부팅된 상태에서 출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완전히 다른 OS를 깔 수만 있다면 우린 전혀 다른 세계사를 쓸 수 있다는 말씀...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민주주의' '인권' '자아실현' '화폐경제' 같은 근대적 결과물 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한국적인 것 -> 탈근대? (이어령, 김지하, 등)
"잘 이해된 말은 해갈의 생수. 그러나 잘못 이해된 말은 찌르는 칼이 된다. 말을 주고받았으니 소통? 칼을 주고받으면 서로 아픈 피만 흐를 뿐이다." (이진경)

2011년 7월 10일 일요일

한겨레 기사에서 확인한 경찰청 박현중 경감의 이런 발언은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국제기준 = 선진국기준!! 뭐 여러 분야, 특히 정책 쪽에선 늘 그래왔으니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너무 화끈하게 표현해서 좀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우측보행', '좌회전 신호등'에 이은 경찰들의 선진국, 국제기준 타령 제 삼탄인 셈이다. 챙피한 줄 모르는, 왜 챙피해야 하는 줄도 모르는 것 같은 저 화끈한 발언에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 (...) 현준영 분당 서울대병원(안과) 교수는 “신호등을 형태로 구분하도록 만들어 주면 색각이상자들도 무리없이 운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정지 신호인 빨간색은 삼각형, 멈춤 신호인 노란색은 사각형, 직진은 원형, 좌회전은 화살표 모양으로 바꾸면 색각이상자들이 쉽게 가려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이런 제안에 난색을 나타냈다. 경찰청 교통운영계 박현준 경감은 “우리만 국제기준과 다른 신호등 모양을 도입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며 “선진국이 도입한다면 우리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2011년 7월 6일 수요일

공존의 이유, 2011

너무 솔직해지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상처가 많은 우리들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그런 애기들만 나누기로 합시다

가벼운 얘기를 꺼내기 힘들다면
그 때 헤어집시다
너무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도록 합시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하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렇게 대세를 거스르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올지라도
늘 해왔던대로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조병화 '공존의 이유'를 현재 내 심리상태를 관찰하며 비틀어 보다 2011.7.6.]